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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랜디존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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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서 투수들이 정점에 도달하는 나이는 만 29세다(역대 사이영상 수상자의 평균 나이는 29.8세다). 정점에 오른다는 것은 내리막길이 시작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9세는 투수들의 하락세가 시작되는 나이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야구선수라 하기에는 너무 큰 키와 너무 긴 팔, 깡마른 몸매를 가진 투수가 있었다. 스웨덴의 높이뛰기 선수인 패트릭 스요베리와 같은 외모의 그는, 엉망이었던 제구력 탓에 28세 시즌까지 49승을 올리는 데 그쳤다.

하지만 남들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는 29살부터, 그는 맹렬한 질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나이로 마흔일곱이 된 올해, 불가능할 것 같았던 300승을 달성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투수, 랜디 존슨(45)이다.


208cm

아버지로부터 큰 키와 뛰어난 운동신경을 물려받은 존슨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미 키가 지금과 같은 208cm에 이르렀다. 미네소타 출신 경찰관이었던 존슨의 아버지는 키가 198cm였고 야구와 스키점프를 즐기는 스포츠광이었다.

1982년 드래프트에서 애틀랜타는 존슨을 4라운드에서 지명했다. 그리고 당시 4라운드 계약금으로는 파격적인 5만 달러를 제시했다. 하지만 존슨은 아버지와 코치의 조언에 따라 프로가 아닌 대학을 택했다. 그렇게 90년대 최고의 좌완 2명이 같은 팀에서 출발하는 역사적인 사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학에서 존슨의 전공은 미술(fine arts)이었다. 그는 학교 밴드의 드럼 연주자였으며, 록 잡지를 만드는 일도 했다. 또한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진짜 꿈은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서는 것이었다.

그가 진학한 USC에는 1년 선배 마크 맥과이어가 있었다. 1학년 때 투수와 타자를 병행했던 맥과이어는 존슨이 들어온 후부터 타자에 전념했다. 3학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존슨은 드래프트에 나올 투수 중 4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존슨은 부담감에 시즌을 망쳤고 평가도 급락했다.

B J 서호프(1순위 밀워키) 윌 클락(2순위 샌프란시스코) 바비 위트(3순위 텍사스) 배리 라킨(4순위 신시내티) 등 LA 올림픽 멤버들이 쏟아져 나온 1985년 드래프트에서, 존슨은 비정상적인 키를 제외하고는 그리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파격적으로 그를 전체 34순위에서 지명했다.

존슨은 최고의 강속구와 함께 최악의 제구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마이너리그 시절 존슨은 10개의 삼진을 잡아내 구단 관계자들을 환호케 하다가도, 바로 다음 경기에서 10개의 볼넷을 내줘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1987년 존슨은 더블A에서 140이닝을 던지는 동안 무려 163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그리고 128개의 볼넷을 허용했다.

서울올림픽 개최 하루 전인 1988년 9월16일. 존슨은 메이저리그 데뷔전에 나서 5이닝 2실점 승리를 따냈다. 이로써 존슨은 1940년대에 나타났다 통산 7승으로 사라졌던 자니 지(Gee)의 역대 최장신 기록을 1인치 경신했다.

그렇다고 제구 문제가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1989년 몬트리올은 존슨이 29⅔이닝 26볼넷 26삼진을 기록하자, 뉴욕 메츠가 놀란 라이언을 포기한 것보다, LA 다저스가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포기한 것보다 훨씬 빨리 존슨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당시 포스트시즌에 도전했던 몬트리올은 존슨을 포함한 유망주 4명을 내주고 시애틀에서 사이영상급 좌완인 마크 랭스턴을 데려왔다(그로부터 4년 후, 몬트리올은 새로운 괴물을 얻었다. 페드로 마르티네스였다).

1991년 존슨은 1977년 놀란 라이언(204개) 이후 가장 많은 152개의 볼넷을 내줬다. '키가 6피트6인치(198cm) 이상인 투수는 정상적인 작동이 불가능하다'는 스카우트계 격언은 이번에도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1992년
1992시즌 중반, 경기전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놀란 라이언은 갑자기 큰 그림자가 지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존슨이었다. 당시 8연패에 빠져 있었던 존슨은 평소 존경했던 라이언을 보게 되자 눈을 딱 감고 찾아가 고민을 털어놨다. 라이언은 흔쾌히 돕기로 하고 전담코치 톰 하우스와 함께 분석에 들어갔다.

라이언과 하우스가 찾아낸 문제점은 공을 던지는 순간 내딛는 오른발의 뒤꿈치가 미세하게 3루 쪽으로 향한다는 것. 발을 홈 플레이트 쪽으로 내딛지 못한 존슨은 무게 중심이 자꾸 3루 쪽으로 쏠렸고, 그 때마다 암 앵글(arm angle)이 달라졌다. 제구 불안의 결정적인 문제를 찾아낸 것이었다.

이후 라이언을 야구 인생 최고의 은인으로 여기게 된 존슨은 1993년 라이언이 은퇴 경기를 치르자,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이제부터는 자신이 대를 이어가겠다는 의미로, 라이언의 등번호인 34번을 달고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존슨의 또 다른 문제는 불같은 성질이었다. 마이너리그 시절 존슨은 왼 손목에 타구를 맞은 후 교체된 적이 있는데, 손목이 부러진 것으로 지레짐작한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오른손 주먹으로 벽을 쳤다. 하지만 검사 결과 손목은 단순 타박상이었다. 대신 존슨은 오른손에 깁스를 했다. 마운드 위에서 존슨은 너무 쉽게 흥분했고 또 분노했다. 분노의 상당 부분은 동료들에게로 향했다.

이 때 또 다른 은인이 나타났다. 스티브 칼튼이었다. 1972년 59승 팀에서 27승을 거두는 등 꼴찌 팀의 에이스 자리를 묵묵히 지켜 결국 월드시리즈 우승반지까지 차지한 칼튼은 존슨에게 중요한 한마디를 했다. 동료들이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동료들을 위해 있는 것. 지금까지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존슨은 칼튼의 말에 무릎을 쳤다. 칼튼의 조언 이후, 존슨의 동료들은 더 이상 실책 후에 있었던 존슨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게 됐다.

그 해 12월, 운명적인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존슨은 개인 훈련을 하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크게 자책, 가족들에게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한 마지막 당부를 전해 듣고 생각을 바꾸었다(존슨은 이를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존슨은 자신의 글러브에 같은 아버지의 이름을 새기는 것으로, 최고의 투수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29살의 너무 늦은 나이에, 존슨은 다시 시작했다. 존슨은 라이언의 기술적 조언과 칼튼의 심리적 조언을 완벽히 수행했다. 이에 라이언 다음으로 많은 삼진을 잡아낸 투수, 칼튼보다 더 많은 삼진을 잡아낸 좌완이 됐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눈물로 했던 약속을 지켜냈다.


1993년 - 1987년 라이언 이후 처음으로 300K를 달성한 투수가 되다. 1972년 칼튼 이후 처음으로 300K를 달성한 좌완이 되다.

1995년 - 1987~1990년 라이언 이후 처음으로 탈삼진 4연패에 성공한 투수가 되다. 매덕스(19승2패)와 함께 역대 최초의 200이닝 이상 9할 승률(18승2패)을 만들어내다. 첫번째 평균자책점 타이틀과 첫번째 사이영상을 따내다.


1997년 
- 첫번째 20승을 달성하다. 역사에 남은 활약으로 팀의 첫번째 포스트시즌 진출과 디비전시리즈 승리를 이끌다. 다승-평균자책점-탈삼진 2위. 다승-평균자책점-탈삼진 1위 로저 클레멘스에 이어 사이영상 투표 2위에 오르다. 디비전시리즈에서 존슨에게 당한 양키스가 시즌 후 존슨의 트레이드를 타진하다. 시애틀이 마리아노 리베라와 앤디 페티트를 요구하다.

1998년 - 재계약이 무산된 시애틀에서 맥빠진 시즌을 보내다. 휴스턴으로 트레이드된 후 11경기에서 10승(1패 1.28)을 따내다. 2번째 300K를 달성하다. 가족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집과 가까운 애리조나를 선택하다.

1999년 - 역대 5위에 해당되는 364개의 삼진을 잡아내다. 한 시즌 23번의 10K 경기를 만들어내다(라이언과 타이). 1987년 라이언 이후 처음으로 평균자책점과 탈삼진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한 내셔널리그 투수가 되다. 2번째 사이영상을 차지하다. 마르티네스와 함께 양 리그 사이영상을 차지한 역대 2,3호 투수가 되다(1호 게일로드 페리, 4호 클레멘스).

2000년 - 사이영상 2연패에 성공하다. 마지막 경기 부진(3⅓이닝 8자책)으로 평균자책점이 2.38에서 2.64로 올라 평균자책점-탈삼진 동반 2연패에 실패하다(1위 케빈 브라운 2.58). 3년째 좌타자에게 홈런을 맞지 않다.
 
2001년 - 스프링캠프에서 비둘기를 잡다. 역대 3위에 해당되는 372삼진을 만들어내다. 4년 연속 300K를 기록한 최초의 투수가 되다. 3년 연속 23번의 10K 경기를 만들어내다. 클레멘스(2회)와 우드에 이어 역대 4번째 20K를 달성하다. 9이닝당 13.4K의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우다. 사이영상 3연패에 성공하다. 1968년 미키 롤리치 이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3승 투수가 되다.

2002년 - 매덕스에 이어 사이영상 4연패에 성공한 2번째 투수가 되다. 5년 연속 300K를 달성한 최초의 투수가 되다. 6번째 300K를 달성, 라이언과 타이를 이루다. 1972년 칼튼에 이어 처음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좌완이 되다. 1996년 스몰츠 이후 24승째를 따낸 첫번째 투수가 되다. 본즈, 존슨과의 38번째 대결 만에 첫 홈런을 때려내다(통산 3홈런).

2004년 - 9번째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하다. 리그에서 가장 위력적인 시즌을 보내고도 16승14패에 그쳐 사이영상 투표에서 2위에 그치다. 클레멘스와의 투표 대결에서 2번째 패배를 당하다. 사이 영이 1904년에 세웠던 37세37일의 최고령 퍼펙트게임 기록을 갈아치우다(40세251일).

나이경기ERA이닝탈삼진K/9AVG
198824 4 3 02.42 26 25 8.7.225
19892529 7134.82160.2130 7.3.248
1990263314113.65219.2194 7.9.216
1991273313103.98201.122810.2.213
1992283112143.77210.124110.3.206
1993293519 83.24255.130810.9.203
1994302313 63.1917220410.7.216
1995313018 22.48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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