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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전당 커브 마스터 버트 블라일레븐 통산 완봉승만 6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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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밖에 있는 최고의 투수'

버트 블라일레븐이 13전14기 만에 이 꼬리표를 뗐다. 블라일레븐은 6일(한국시간) 발표된 2011년 명예의 전당 투표 결과에서 79.7%의 득표율로 지긋지긋했던 '75'를 넘어섰다. 1998년부터 도전을 시작한 블라일레븐은 올해도 실패했을 경우 기회가 1번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었다. 선발투수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것은 역대 31번째로, 1999년 놀란 라이언 이후 12년 만이다.

블라일레븐은 역대 순위에서 탈삼진 5위(3701) 완봉승 9위(60) 선발 등판 11위(685) 이닝 14위(4970)에 올라 있는 대투수. 톰 시버(3640)보다 더 많은 삼진을 잡아내고 월터 존슨(666)보다 더 많은 경기에 선발로 나섰으며, 로저 클레멘스(4916⅔)보다 더 많은 이닝을 던졌다.

1900년 이후 출생한 투수 중 블라일레븐(60)보다 더 많은 완봉승을 거둔 투수는 워렌 스판(63) 놀란 라이언(61) 톰 시버(61) 3명뿐이다. 이들은 모두 첫 해에 들어갔으며, 시버(98.84%)와 라이언(98.79%)은 아직까지 득표율 역대 1,2위를 지키고 있다. 지금까지 완봉승을 50차례 이상 기록한 20명 중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한 선수는 블라일레븐이 유일했다.

3000탈삼진을 달성한 투수는 19명

선수의 팀 기여도를 측정하는 효과적인 지표로 인정받고 있는 WAR(Wins Above Aeplacement)에서 블라일레븐은 투수 역대 13위(90.10)에 올라 있는데, 그의 뒤에는 크리스티 매튜슨(87.70) 밥 깁슨(85.60) 놀란 라이언(84.80) 스티브 칼튼(84.40) 등이 있다(베이스볼 레퍼런스 기준).

블라일레븐이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고전한 이유로는 가장 먼저 300승 실패가 언급된다. 하지만 블라일레븐보다 먼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선발투수 30명 중 첫 5명(월터 존슨, 매튜슨, 사이 영, 피트 알렉산더, 레프티 그로브)을 제외한 나머지 25명 중에서 300승 달성자는 8명에 불과하다. 또한 나머지 17명은 모두 블라일레븐(287승)보다 적은 승수로 들어갔다.

두 번째 이유는 위력 부족. 하지만 블라일레븐의 조정 평균자책점은 118로, 앞서 명예의 전당에 오른 9명 중 조정 평균자책점이 이보다 더 좋은 선수는 짐 파머(125)와 톰 시버(127) 둘뿐이다. 그럼에도 블라일레븐이 홀대를 받은 것은 .534(287승250패)라는 평범한 승률과 함께 올스타전 2회 출장, 사이영상 3위 2회, 20승 1회, 탈삼진 타이틀 1회라는 초라한 수상 경력 때문이다.

하지만 블라일레븐은 역사상 가장 지독한 불운에 시달린 투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라일레븐은 평균자책점에서 7번이나 리그 5위 내에 들었는데(그보다 더 많이 오른 선수는 11명뿐이다), 그 7시즌에서 평균적으로 35경기에서 선발로 나서 17번을 완투하고, 평균 271이닝을 2.78의 평균자책점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블라일레븐에게 돌아온 성적은 평균 17승13패가 고작이었으며, 그 중 세 시즌에서는 각각 16승15패, 17승17패, 17승16패를 기록했다.

만약 블라일레븐이 조금만 덜 불운해 13승을 더 거두어 300승을 채웠거나, 지난해 13승12패의 펠릭스 에르난데스에게 사이영상을 준 흐름이 조금만 일찍 찾아왔더라도 이렇게 애태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커브를 사랑한 소년
릭 앨버트 블라일레븐은 1951년 네덜란드 중부 자이스트(Zeist)에서 태어났다. 네덜란드식 이름은 Rik Aalbert Blijleven.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에 등장한 네덜란드 태생 투수는 4명. 이들이 올린 승수는 도합 317승으로 그 중 287승을 블라일레븐이 올렸다. 2007년 네덜란드 출생자로는 블라일레븐 이후 17년 만에 승리를 따내 화제를 모았던 릭 반덴 허크는 통산 8승을 기록 중이다.

블라일레븐이 네덜란드 대표팀의 투수코치를 맡았던 2009년 WBC에서 네덜란드가 도미니카공화국을 꺾는 대파란을 일으킨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블라일레븐은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왔다. 블라일레븐 가족이 정착한 곳은 남부 캘리포니아였다. 다저스와 샌디 코팩스의 열성팬이었던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코팩스 경기를 자주 보러 갔다. 블라일레븐은 코팩스, 그리고 그가 던지는 커브와 사랑에 빠졌다. 코팩스와 밥 펠러의 커브를 연구하고 또 연구한 블라일레븐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커브를 던진 투수 중 1명이 됐다.

블라일레븐은 완벽한 12-6의 낙차를 자랑한 <오버핸드 드롭 커브>와 팔을 내려서 던지는 <라운드하우스 커브>, 부상 이후 1983년에 개발해 큰 효과를 본 <슬로 커브> 3가지 종류의 커브를 던졌다. 그 중 라운드하우스 커브는 코팩스의 팔꿈치를 망가뜨린 범인이었다(극단적인 오버핸드 딜리버리였던 코팩스는 중간부터 던지기 시작한 라운드하우스 커브가 엄청난 독이 됐다). 하지만 블라일레븐은 코팩스의 실패를 거울 삼아 문제가 없는 딜리버리를 만들어냈다.

롭 네이어는 자신의 저서에서 블라일레븐의 커브를 코팩스, 그리고 모데카이 브라운의 '세 손가락 커브'에 이어 역사상 3번째로 위력적이었던 커브로 선정했다(우리 세대의 선수 중에서는 데이빗 웰스가 10위에 올라 있으며, 배리 지토는 'others'에 이름이 올랐다). 그와 동시대를 뛴 자니 벤치, 레지 잭슨, 로드 커루도 블라일레븐의 커브를 자신이 경험한 최고의 변화구로 꼽았다.

블라일레븐은 선천적으로도 커브를 잘 던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비정상적으로 긴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어린 시절 그는 미국 친구들로부터 (손가락으로 둑에 난 구멍을 막아 사람들을 구한) '네덜란드 소년'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고).

고교 시절 블라일레븐이 야구 못지 않게 열정을 쏟았던 스포츠는 특이하게도 크로스 컨트리였다. 크로스 컨트리를 통해 만든 그의 강력한 하체는 메이저리그에서 22년을 뛴 롱런의 결정적인 바탕이 됐다. 등판이 있었던 날도 거르지 않고 매일 2시간 이상 자전거를 탔던 놀란 라이언, 마라톤 선수냐는 놀림을 받았던 '미스터 허벅지' 톰 시버도 블라일레븐과 같은 경우였다.

열아홉에 데뷔하
고교 졸업반이었던 1969년, 블라일레븐은 3라운드 지명을 받고 미네소타에 입단했다. 마이너리그에서 단 21경기만 뛰고 올라온 그는, 1970년 6월6일 정확히 드래프트 지명 1년 만에 만 19세60일의 나이로 데뷔전을 치렀다. 이미 그는 메이저리그 최정상급의 커브를 혼자 마스터한 상태였다.

데뷔전에서 블라일레븐은 첫 상대 리 메이에게 리드오프 홈런을 맞았다. 하지만 이후 완벽한 피칭으로 7이닝 7K 1실점 승리를 따냈다. 25경기에 선발로 나서 5번을 완투하고 10승9패 3.18을 기록한 블라일레븐은 <스포팅 뉴스>에 의해 아메리칸리그 올해의 신인으로 선정됐다.

1971년 스무 살의 블라일레븐은 38경기에 나서 17번을 완투했고 278⅓이닝을 던졌다. 평균자책점은 리그 5위(2.81). 하지만 득점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는 16승15패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블라일레븐이 패한 15경기에서 미네소타가 낸 득점은 총 18점이었다. 1972년에도 38경기에서 17승17패 2.73.

1973년 블라일레븐은 40경기에 선발로 나서 25번을 완투했다. 그리고 리그에서 가장 많은 9번의 완봉승을 거뒀다. 블라일레븐은 평균자책점에서도 2위(2.52)에 올랐지만(조정 평균자책점은 1위) 20승17패에 그쳤고, 사이영상 투표에서는 짐 파머, 놀란 라이언 등 쟁쟁한 투수들에 밀려 7위에 그쳤다.

한편 그 해 블라일레븐은 325이닝을 던졌는데, 이는 만 22세 이하 투수가 300이닝을 던진 마지막 기록으로 남아 있다. 22세 이하 투수가 한 해 25번의 완투를 한 것 역시 블라일레븐이 마지막으로, 라이브볼 시대 이후로는 1930년 웨스 퍼렐, 1940-1941년 밥 펠러와 함께 블라일레븐이 전부다.

하지만 너무 일찍 오른 스타덤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블라일레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삼진 욕심을 너무 낸다는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일부 홈 팬들이 자신에게 야유를 보내자 이죽거리는 답례를 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976년 구단이 자신의 연봉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블라일레븐은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이후 툭하면 터져 나올 '트레이드 요구'의 시작이었다. 결국 블라일레븐은 시즌 중반 텍사스로 트레이드됐다.

방랑의 시작
9월23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의 경기. 사타구니 부상에서 돌아와 2주 만에 마운드에 오른 블라일레븐은 8회까지 1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8회 마지막 타자를 잡고 내려오면서 부상이 재발했다. 9회 다시 올라온 블라일레븐은 모든 공을 커브로만 던졌고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1977년에도 활약은 좋았다(30경기 15완투 14승12패 2.72). 하지만 블라일레븐은 텍사스로서는 정말 드물었던 전국 방송 경기에서 카메라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쳐드는 초대형 사고를 쳤다. 구단주는 '격노 크리'를 탔고 블라일레븐은 보따리를 싸야 했다. 블라일레븐은 총 11명이 이동한 메이저리그 최초의 4각 트레이드를 통해 피츠버그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데뷔 첫 해인 1970년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2이닝을 던진 것이 포스트시즌 경험의 전부였던 블라일레븐은, 1979년 피츠버그가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챔피언십시리즈 3차전에서 1실점 완투승을 따낸 블라일레븐은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는 짐 파머와 박빙의 승부를 펼쳤으며, 5차전에서는 4이닝 무실점 구원승을 따냈다(3경기 2승 1.42).

하지만 블라일레븐은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척 태너 감독이 좀처럼 완투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블라일레븐은 1971년부터 1978년까지 288경기에 나서 136번이나 완투를 했지만(완투율 47.2%) 1979년에는 37경기 4완투에 그쳤다. 참다 못한 블라일레븐은 1980년 시즌에 앞서 팀에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4월을 걸렀다. 결국 블라일레븐은 시즌 후 클리블랜드로 넘겨졌다.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연평균 268이닝을 기록했던 블라일레븐은 1981~1983년 어깨 부상에 시달리며 평균 112이닝을 던지는 데 그쳤다. 하지만 1984년 부상을 털어내고 화려하게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신무기 슬로커브가 있었다.

1984년 블라이레븐은 19승7패 2.87을 기록했다. 하지만 5월 중순 경기에 앞서 외야에서 몸을 풀다 날아온 공에 발등 골절상을 입어 한 달 가까이를 날린 것이 치명타가 됐다. 이 부상은 블라일레븐에게서 통산 2번째 20승과 함께 생애 첫 사이영상도 앗아갔다(사이영상 투표 3위).

블라일레븐은 1985시즌 중반 통산 5번째로 트레이드가 됐다. 이 번에 그를 데려간 팀은 친정 팀 미네소타였다. 블라일레븐은 두 팀에서 뛴 그 해 선발(37) 완투(24) 이닝(293⅔) 탈삼진(206)에서 리그 1위를 휩쓸고 평균자책점에서도 5위(3.16)에 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17승16패에 그쳤다.

블라일레븐은 1986년 17승, 1987년 15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평균자책점은 부상으로 4경기밖에 나서지 못한 1982년을 제외하면 데뷔 후 처음으로 4점대를 넘었다. 1986년 50개를 맞아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세우고, 1987년에도 46개를 맞아 '2년간 96개' 최고 기록을 세운 피홈런이 문제였다. 블라일레븐은 원래부터 볼넷을 극도로 꺼렸으며 '솔로홈런은 맞아도 좋다'는 식의 공격적인 피칭을 했는데, 당시 초기 메트로돔은 메이저리그에서 소문난 홈런공장이었다. 블라일레븐이 22년을 뛰면서 25개 이상의 홈런을 내준 것은 이 두 시즌이 전부다.

미네소타에서 블라일레븐은 행복했다. 특히 프랭크 바이올라 등 어린 선수들의 개인교사 노릇을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블라일레븐은 1988년 10승17패 5.43이라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고, 시즌 후 에인절스로 트레이드됐다. 6번째이자 생애 마지막 트레이드였다.

은퇴, 다시 미네소타로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1989년, 만 38세의 블라일레븐은 33경기에서 17승5패 2.73을 기록하고 리그에서 가장 많은 완봉승(5)을 따냈다. 사이영상 투표 4위에 올랐으며, 올해의 재기 선수로 선정됐다. 하지만 이듬해 블라일레븐은 다시 추락했고, 그 이듬해에는 어깨 수술을 받고 시즌을 완전히 날렸다.

1992년 8승12패 4.74에 그친 후 에인절스에서 방출된 블라일레븐은, 1993년 초청선수 자격으로 미네소타의 스프링캠프에 합류했다. 하지만 결국 개막전 로스터에 들지 못했고 은퇴를 선언했다.

블라일레븐은 1996년부터 미네소타 전담 해설가로 활약하면서 미네소타 팬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블라일레븐은 2007년 뉴욕 메츠와의 인터리그 경기에 앞서 요한 산타나와 '완봉승을 거두면 머리를 밀기로' 내기를 했다. 산타나는 2년 동안 완봉승이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해 볼 만한 내기였다. 하지만 괴물 같은 산타나는 '9이닝 1탈삼진'의 맞춰잡기를 한 끝에 기어코 완봉승을 거뒀고, 경기 후 덕아웃에서 블라일레븐의 머리를 직접 밀었다.

블라일레븐은 자주 감독, 프런트, 팬들과 충돌했고, 툭하면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하지만 덕아웃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쾌활했으며 특히 후배들을 아꼈다. '덕아웃의 악동'으로 악명이 높았던 블라일레븐의 주특기는 동료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사이 그가 신고 있는 신발 끈에 몰래 불을 붙이는 것. 이로 인해 블라일레븐은 동료들 사이에서 '핫 풋'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커트 실링의 필라델피아 시절은 '불운'과 '고군분투'로 상징된다. 하지만 블라일레븐은 커리어 전체가 실링의 필라델피아 시절과 같았다. 하지만 블라일레븐은 이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그 보상을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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