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와 싸운 그 분... 루 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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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의 철마, 영원한 신사로 통하는 루 게릭은 양키스의 1루수이자 4번타자로 맹활약한 전설적인 선수다. 1903년 뉴욕에서 출생한 그는 컬럼비아 대학 출신의 수재이기도 했다.
1923년 양키스에 입단한 그는 윌리 팝이란 뛰어난 1루수에 가려 선발 출장의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어느 날 핍이 두통을 핑계로 경마장에 간 사이 핀치 히터로 출전, 이 날 이후 게릭은 14년간 단 한게임도 빠지지 않고 출전하는 2,130연속 게임의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다.(이후 립켄 주니어가 2,632경기를 연속 출장하며 철마를 뛰어넘은 철인으로 등극한다.)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함께 나란히 양키스의 핵타선을 이끌었던 그는 빼어난 활약에도 불구, 항상 베이브 루스의 그늘에 가려 활약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데뷔 첫 해 2할9푼대의 타격을 기록한 이후 1938년까지 3할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고 13년 연속 100타점 이상의 기록과, 생애통산 타점 1,990점은 베이브루스, 행크아론에 이어 3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이다. 또한 1931시즌에 기록한 184타점은 아메리칸 리그 최고 기록이다.
월드시리즈에서 그의 활약은 더욱 돋보였다. 월드시리즈 통산 3할6푼의 타율에 10홈런을 기록, 양키스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1932년 6월 3일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 4타석 연속홈런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도 세웠다.
1935년 베이브루스가 팀을 떠난 뒤에는 조 디마지오와 콤비를 이루며 양키스의 핵타선을 이끌어 가던 그는 1939년 시즌 개막 후 극심한 슬럼프와 건강상 이유로 양키스의 1루 자리를 내놓았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그는 당시로선 치료가 불가능하던 세포막 경화증에 걸렸는데, 이 병은 그의 이름을 따 "루 게릭병"이라 불리운다.
그해 7월4일 독립기념일 6만팬들이 운집한 가운데 명예로운 은퇴식을 가졌고 기자단은 그를 은퇴 즉시 명예의전당에 헌액했다. 1941년 6월 2일, 38세를 일기로 게릭은 세상을 떠났다.
1923년 양키스에 입단한 그는 윌리 팝이란 뛰어난 1루수에 가려 선발 출장의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어느 날 핍이 두통을 핑계로 경마장에 간 사이 핀치 히터로 출전, 이 날 이후 게릭은 14년간 단 한게임도 빠지지 않고 출전하는 2,130연속 게임의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다.(이후 립켄 주니어가 2,632경기를 연속 출장하며 철마를 뛰어넘은 철인으로 등극한다.)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함께 나란히 양키스의 핵타선을 이끌었던 그는 빼어난 활약에도 불구, 항상 베이브 루스의 그늘에 가려 활약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했다. 데뷔 첫 해 2할9푼대의 타격을 기록한 이후 1938년까지 3할 아래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고 13년 연속 100타점 이상의 기록과, 생애통산 타점 1,990점은 베이브루스, 행크아론에 이어 3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이다. 또한 1931시즌에 기록한 184타점은 아메리칸 리그 최고 기록이다.
월드시리즈에서 그의 활약은 더욱 돋보였다. 월드시리즈 통산 3할6푼의 타율에 10홈런을 기록, 양키스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1932년 6월 3일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 4타석 연속홈런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도 세웠다.
1935년 베이브루스가 팀을 떠난 뒤에는 조 디마지오와 콤비를 이루며 양키스의 핵타선을 이끌어 가던 그는 1939년 시즌 개막 후 극심한 슬럼프와 건강상 이유로 양키스의 1루 자리를 내놓았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그는 당시로선 치료가 불가능하던 세포막 경화증에 걸렸는데, 이 병은 그의 이름을 따 "루 게릭병"이라 불리운다.
그해 7월4일 독립기념일 6만팬들이 운집한 가운데 명예로운 은퇴식을 가졌고 기자단은 그를 은퇴 즉시 명예의전당에 헌액했다. 1941년 6월 2일, 38세를 일기로 게릭은 세상을 떠났다.
역사상 가장 안타까운 선수였던 루 게릭. 그 누구보다 존경받는 선수였기에 그의 죽음은 모든 이들에게 아픔이자 안타까움이었다. 그는 베이브루스보다 더 많은 타점을 올릴 수 있었고 지미 팍스보다 많은 홈런을 때릴 수 있었다. 몸이 성하였다면 립켄 주니어도 그의 연속 출장기록을 깨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점점 굳어갔고 모두가 울었지만 자신만이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고 정작 그라운드를 떠날 당시엔 흐느끼는 주위사람들에게 미소를 보여 주었다.
백이면 백 그의 상황이 되면 누구에게 억울함을 호소할까 고민일 것이다. 그는 은퇴연설에서 떠나는 마당에 자신이 행운아임을 자랑스러워 했다.
" 나는 야구장에서 17년간 있어 왔고 여러분들로부터 친절한 박수와 용기어린 격려를 받아오기만 했습니다.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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