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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손가락으로 던진 투수에 대하여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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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ossible is nothing'은 축구선수 데이빗 베컴, 장대높이뛰기선수 옐레나 이신바에바, 농구선수 길버트 아레나스가 등장하는 모 스포츠 브랜드 광고의 카피다. 메이저리그 역사를 들춰보면 이 문구의 주인공이라 할만한 선수가 있다.

모데카이 피터 센테니얼 브라운(Mordecai Peter Centennial Brown). 모데카이는 삼촌, 피터는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며 센테니얼은 미국 독립 100주년인 1876년에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1876년은 내셔널리그가 창설된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세 손가락의(Three Finger) 브라운'과 '광부(Miner) 브라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불가능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 그의 눈물과 땀으로 이루어진 별명들이다.

그가 '세 손가락의 브라운'으로 불렸던 것은 진짜로 손가락이 3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세 손가락으로 통산 239승130패 방어율 2.06을 기록하고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방어율 2.06은 에드 왈시(195승126패 1.82)와 에디 조스(160승97패 1.89)에 이은 역대 3위이지만, 3천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 중에서는 최고다.

브라운은 7살 때 삼촌의 농장에 놀러갔다 호기심에 옥수수 절삭기에 손을 집어넣는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질렀다. 다시 얼마 후에는 토끼를 쫓아가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져 손가락이 부러졌다. 이 2번의 사고로 인해 브라운은 오른손 검지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중지는 심하게 뒤틀려졌다. 새끼 손가락은 끝마디가 구부러진 채 마비됐으며, 엄지 손가락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게 됐다.

가난한 농부의 8남매 중 1명이었던 브라운은 10대 때부터 석탄을 캐는 광부 생활을 했다. 그가 '광부 브라운'으로 불렸던 것은 진짜로 광부였기 때문이다. 탄광 생활은 본격적인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하기 전인 24살 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브라운은 고된 일과 속에서도 야구에 대한 꿈을 접지 않았다. 동네 팀의 스위치히터 3루수였던 브라운은 왼손 대신 문제가 있는 오른손으로 공을 던졌다.

어느날 브라운에게 운명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팀의 유일한 투수에게 문제가 생겨 등판할 수 없게 된 것. 마운드에 오른 브라운은 상대타자들이 난생 처음 보는 공을 던졌다.

당시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공은 기본 구질인 패스트볼과 1870년대에 캔디 커밍스가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던지다 터득했다고 전해지는 커브. 그리고 제대로 던지는 투수가 거의 없었으며 당시에도 위험천만한 구질로 여겨졌던 스크루볼과 공에 침을 발라 궤적에 변화를 주는 스핏볼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브라운이 던지는 커브는 비정상적인 손을 가진 그만이 던질 수 있는 공이었다. 공이 갑자기 테이블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는 증언으로 볼 때 브라운의 커브는 지금의 포크볼이나 스플리터와 같은 궤적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의 스윙으로 조 잭슨을 꼽은 바 있는 타이 콥은 훗날 자신이 상대한 가장 어려운 구질로 브라운의 커브를 선택했다.

브라운은 이 공을 제대로 던지기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왔다. 그리고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이겨낸 끝에 마구를 완성했다. 이후 많은 투수들이 비슷한 공을 던지려고 노력했지만 사실상 중지 하나에 의지해 던지는 브라운의 커브를 익힌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브라운은 이 공에 대한 제구력까지 완벽했다.

 

브라운이 던지는 공에 대한 소문은 '발없는 말이 천리를 달리듯' 빠르게 퍼져나갔다. 지역 아마추어 팀에서부터 시작한 브라운은 세미프로와 마이너리그를 거쳐 1903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그의 나이 26살 때였다.

브라운은 팀에서 가장 좋은 2.60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세인트루이스는 리그 1위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의 승차가 무려 46경기반인 못말리는 꼴찌팀이었다. 브라운의 성적도 9승13패에 그쳤다. 시즌 후 세인트루이스는 브라운을 다른 팀으로 넘겼다. 데뷔전 승리의 제물이었던 시카고 컵스였다.

브라운은 전성기였던 1904년부터 1911년까지 8년간 181승을 쓸어담았다. 또한 틈날 때마다 구원투수로 나서 팀의 승리를 지켜냈다. 세이브가 만들어진 후 그의 등판일지를 다시 따져보자 1911년 13세이브를 포함해 통산 49세이브가 나왔다. 지금처럼 1이닝 세이브가 아닌 대부분이 3이닝을 초과하는 세이브들이었다.

브라운이 5년 연속으로 '20승-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1906년부터 1910년까지의 5년은 컵스 최고의 전성기였다. 컵스는 1906년의 116승 최다승과 최고승률(.763) 기록을 비롯해 5년간 연평균 106승47패(.693)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또 월드시리즈에 4차례 올라 1907년과 1908년에 우승을 차지했다. 컵스 역사상 단 2번뿐인 월드시리즈 우승이 이때 나왔다. 브라운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꺾은 2번의 월드시리즈에서 3경기 3승무패 방어율 제로를 기록했다.

브라운도 1906년에 1900년 이후 단일시즌 역대 2위에 해당되는 1.04의 방어율(1위 1914년 더치 레오나드 0.96)을 기록한 것을 비롯해 5년간 평균 1.42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당시는 점수가 적게 났던 '데드볼 시대'였지만 5년간의 평균 조정방어율 188은 샌디 코우팩스가 '황금의 5년' 동안 기록한 168을 크게 능가한다.

당시 브라운을 최고투수로 만든 것은 그가 만들어낸 공만이 아니었다. 178cm 80kg으로 그때만 해도 큰 체구였던 브라운은 당시 아무도 하지 않았던 웨이트 훈련으로 누구보다도 강인한 몸을 유지했다. 또한 브라운은 당대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한 투수였다. 고르지 못한 그라운드와 형편없는 글러브 때문에 실책이 속출하고 번트안타가 많았던 당시에 브라운의 수비력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브라운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크리스티 매튜슨의 최대 라이벌이기도 했다. 1905년 첫 맞대결에서 브라운과 매튜슨은 8회까지 둘다 노히트노런을 이어갔다. 하지만 브라운이 9회에 안타와 함께 1점을 내주면서 노히터는 매튜슨의 차지가 됐다. 그러나 브라운은 이후 '머클의 본헤드'로 유명한 1908년 시즌 최종전까지 이후 9차례 대결에서 모두 승리를 따냈다. <베이스볼 페이지>에 따르면 25차례 맞대결에서 브라운이 거둔 성적은 13승10패. 매튜슨은 11승13패였다.

1911년 만 34세 시즌을 끝으로 하향세에 접어든 브라운은 1912년 5승에 그친 후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됐다. 페더럴리그에서 1914년과 1915년을 보낸 브라운은 1916년 페더럴리그가 붕괴되자 옛 동료 조 팅커가 감독으로 있는 컵스의 유니폼을 다시 입었다. 그의 나이 39살 때였다.

시즌 막바지 노동절(Labor Day)에 벌어진 컵스와 신시내티의 경기는 두 오랜 라이벌의 마지막 맞대결이었다. 당시 신시내티의 감독이었던 매튜슨은 브라운과의 마지막 경기를 위해 일부러 마운드에 올랐다. 경기가 끝난 후 승리를 거둔 매튜슨과 패전투수가 된 브라운은 긴 악수를 나눴다. 두 투수 모두의 메이저리그 마지막 등판이었다.

브라운은 자신이 쓴 책인 'How to Pitch Curves'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내 '행운의 손'이 언제나 당신들의 옆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그에게 오른손은 불운이 아니라 행운이었다. 물론 그 불운을 행운으로 바꾼 것은 본인 자신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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