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스턴의 전설 제프 배그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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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베이브 루스를 10만달러(현금 2만5000달러와 2만5000달러짜리 수표 3장)에 뉴욕 양키스로 보내는 역사상 최악의 실수를 저지른 보스턴 레드삭스(양키스는 펜웨이파크를 담보로 30만달러도 빌려줬다).
그들의 실수 랭킹에서 역대 2위를 꼽자면 두 말할 것 없이 그로부터 70년 후 제프 배그웰(38)을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넘긴 것이다.
1990년 8월31일(이하 한국시간) 2위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6경기반 차 지구 선두를 달리고 있었던 보스턴은 휴스턴에서 37세의 노장 불펜투수 래리 앤더슨을 데려왔다.
그리고 그 대가로 더블A 이스턴리그에서 타율 .333 출루율 .423 장타율 .457를 기록하며 리그 MVP에 오른 22세의 3루수 유망주 배그웰을 내줬다.
앤더슨은 보스턴에서 15경기에 나서 22이닝을 던졌고 방어율 1.23의 좋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시즌 후 FA로 풀려 보스턴을 떠났고 배그웰은 휴스턴 역사상 최고의 타자가 됐다.
보스턴이 배그웰을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한 것은 팀내 자리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 당시 보스턴의 3루는 7년 연속 200안타 행진을 질주하고 있던 웨이드 보그스가 지키고 있었으며, 1루에는 특급 유망주 모 본이 메이저리그 입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해 22세의 모 본은 트리플A에서 타율. 295 출루율 .371 장타율 .539를 기록하며 놀라운 장타력을 과시했다. 휴스턴이 처음에 달라고 했던 선수도 배그웰이 아닌 모 본이었다.
보스턴 입장에서 볼 때 배그웰은 3루수로서 그리 뛰어난 수비수가 아니었으며, 출루능력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1루수로서의 파워도 부족했다. 결국 루 고먼 단장은 122kg의 거구인 본을 지명타자로 돌리고 배그웰에게 1루수의 기회를 주는 것보다 앤더슨의 한 달을 선택했다.
사실 배그웰에게 보스턴은 단순한 친정팀이 아니었다. 보스턴에서 태어난 배그웰은 인근 코네티컷주에서 레드삭스 네이션의 팬으로서 자랐다. 칼 야스트렘스키를 보면서 언젠가는 자신도 반드시 펜웨이파크에 서겠다고 결심했다.
198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보스턴이 4라운드 전체 109번째로 지명하면서 배그웰의 꿈은 이뤄지는 듯했다. 하지만 배그웰은 결국 펜웨이파크에서 1경기도 뛰지 못한 채 보스턴 유니폼을 벗었다.
하지만 휴스턴에도 3루 주인은 따로 있었다. 당시 휴스턴은 켄 캐미니티에게 꾸준히 기회를 주고 있었다. 결국 스프링캠프에서 1루수로 전환한 배그웰은 개막전에 1루수로 나섰다.
휴스턴은 스프링캠프가 시작되기 전 주전 1루수인 글렌 데이비스를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보냈는데, 이 때 받은 선수는 커트 실링, 스티브 핀리, 피트 하니시였다. 휴스턴은 핀리에게 주전 중견수 자리를 내준 반면, 실링은 다시 1년만에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불펜투수 제이슨 그림슬리와 바꾸는 아쉬운 선택을 했다.
배그웰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타율 .294 15홈런 82타점을 기록하며 휴스턴 역사상 최초로 리그 신인왕에 오른 것. 이듬해 타율 .273 18홈런 96타점을 기록한 배그웰은 1993년 첫 3할 타율(.320)과 첫 20홈런(20홈런 88타점)에 성공했고, 1994년 마침내 폭발했다.
파업으로 시즌이 중단된 94년 배그웰이 올린 성적은 110경기 타율 .368 39홈런 116타점. 100타점과 100득점을 넘은 유일한 내셔널리그 타자였으며, 타율과 출루율(.451)은 4할 타율에 도전했던 토니 그윈(타율 .394 출루율 .454)에 이은 2위, 홈런은 맷 윌리엄스(43개)에 이은 2위였다. 내셔널리그에서 한 타자가 타율 홈런 타점 득점에서 모두 1위 아니면 2위에 오른 것은 1955년 윌리 메이스 이후 처음이었다.
또한 .750의 장타율은 이후 배리 본즈(2001년 .863, 2004년 .812, 2002년 .799)와 마크 맥과이어(1998년 .752)가 넘어서기 전까지 베이브 루스(1920년 .849, 1921년 .843, 1927년 .772) 루 게릭(1927년 .765) 로저스 혼스비(1925년 .756)에 이은 역대 6위에 해당됐다.
결국 배그웰은 휴스턴 최초의 MVP이자 칼 허벨(1936년) 올랜도 세페다(1967년) 마이크 슈미트(1980년)에 이은 내셔널리그 역대 4번째 만장일치 MVP가 됐다(이후 1996년 캐미니티, 2002년 본즈가 만장일치 MVP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2003년까지 10년간 배그웰의 화려한 전성기가 펼쳐졌다. 이 기간 동안 배그웰은 1055타점 1051득점을 기록,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득점과 2번째로 많은 타점(1위 새미 소사 1113타점)을 올렸다.
또 1996년부터 2001년까지는 6년 연속으로 30홈런-100타점-100득점-100볼넷을 기록했다. 이는 2위 테드 윌리엄스보다 2년이나 더 많은 메이저리그 최고기록으로 2002년의 98타점만 아니었다면 8년 연속도 가능할 뻔했다. 한편 배그웰과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난 프랭크 토머스(오클랜드)는 7년 연속 타율 3할-20홈런-100타점-100득점-100볼넷의 메이저리그 최고기록을 가지고 있다.
배그웰의 가치는 방망이뿐이 아니었다. 마크 그레이스와 J T 스노가 철통같이 버티고 있었던 탓에 골드글러브 수상은 1번에 불과했지만 1루수로서 정상급의 수비실력을 자랑했으며, 1997년에는 43개의 홈런과 함께 31개의 도루를 기록, 휴스턴 선수 최초이자 메이저리그 1루수 역사상 최초로 30홈런-30도루를 달성했다. 1999년 42홈런-30도루로 2번째 30-30을 만들어낸 배그웰은 400홈런-200도루를 넘어선 역대 유일의 1루수다.
더 대단한 점은 배그웰이 이 10년 중 6년을 '타자들의 무덤' 애스트로돔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애스트로돔은 거의 매년 홈런팩터에서 메이저리그 최하위였으며, 파울지역 역시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2000년 휴스턴은 배그웰과 크레그 비지오(2루수)를 위해 좌측 펜스가 짧은 엔론필드(현 미닛메이드파크)를 개장했다.
2004년 만 36세의 배그웰에게 이상이 나타났다. 타율이 메이저리그 데뷔 후 가장 낮은 .266으로 떨어지고 9년만에 30홈런에 실패한 것. 메이저리그에서 유일무이한 '기마자세' 타격폼 때문이었다.
1루수이자 거포로서는 왜소한 183cm 88kg의 체격을 가진 배그웰은 스탠스를 자신의 어깨넓이보다 2배 이상 벌린 후 공이 들어오면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면서 파워를 극대화했다. 스탠스가 좁은 상태에서 큰 중심이동 없이 부드러운 스윙을 하는 켄 그리피 주니어(신시내티)와는 정반대의 자세였다(배그웰은 이 타격폼 때문에 왼손이 금이 가는 부상을 3년 연속으로 당했고 이후 반드시 왼손에 보호대를 착용했다).
젊었을 때 매끄럽게 진행됐던 이 복잡한 타격 과정은 나이가 들면서 몸이 따라가지 못했다. 이후 배그웰은 타격폼 수정을 시도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지난해 휴스턴은 1962년 창단 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배그웰(2150경기)도 15년을 함께 뛴 비지오에 이어 역사상 2번째로 많은 정규시즌 경기를 소화한 후 월드시리즈 무대에 나섰다. 하지만 심각한 어깨 부상에 시달리고 있었던 배그웰은 8타석에서 안타 1개를 기록하는데 그쳤고 휴스턴도 월드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
올시즌에 앞서 휴스턴은 홈런 타점 볼넷 장타에서 팀 역대 최고기록을 가지고 있는 배그웰에게 은퇴를 종용했다. 그래야 계약 마지막 해 1700만달러의 연봉 중 1560만달러를 보험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주변에서는 로저 클레멘스에게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함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구단의 섭섭한 처사에 반발했던 배그웰은 스프링캠프에서 자신이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부상자명단 등록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야구를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는 말로 사실상의 은퇴를 선언했다. 이에 휴스턴 구단은 곧바로 보험금을 청구했지만 보험사는 청구 만료일을 넘겼다며 지급을 거부했다. 휴스턴 구단과 보험사는 현재 법정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15년간 2150경기 2314안타 타율 .297 488 2루타 449홈런 1529타점 1517득점 1401볼넷 출루율 .408 장타율 .540.
배그웰이 최종적으로 가지게 된 너무나 눈부신 성적표이자 너무나 아쉬운 성적표이기도 하다. 2년만 더 뛰었더라면 가능할 수 있었던 500 2루타-500홈런-1500타점-1500득점-1500볼넷은 베이브 루스(506-714-2217-2175-2062) 테드 윌리엄스(525-521-1839-1798-2021) 배리 본즈(583-730-1915-2141-2418)만이 가지고 있는 기록이다.
또 배그웰은 마이크 슈미트(548) 미키 맨틀(536) 테드 윌리엄스(521) 멜 오트(511)에 이어 한 팀에서만 500개 이상의 홈런을 때리고 은퇴하는 역대 5번째 선수가 될 수 있었다.
2001년 칼 립켄 주니어(볼티모어)와 토니 그윈(샌디에이고)은 너무도 행복한 은퇴를 했다. 전반기에 은퇴를 선언한 이들은 팬들의 성원과 사무국의 배려속에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후반기 이들이 들르는 모든 구장에서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2004년 에드가 마르티네스(시애틀)도 이들의 길을 따랐다.
반면 배그웰이 유니폼을 벗는 과정은 너무 씁쓸하다. 적어도 휴스턴에게는 이런 식으로 은퇴시켜서는 안되는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