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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은 행크아론 탈삼진은 이 사람 놀란 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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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이 타자의 꽃이라면 투수의 꽃은 탈삼진이다. 통산 5714삼진의 놀란 라이언(324승292패 3.19)이 피운 꽃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화려했다.

탈삼진 3연패를 이어가고 있는 요한 산타나의 3년간 평균이 250개임을 감안하면, 산타나와 같은 모습으로 23년을 뛰어야 라이언을 넘어설 수 있다. 랜디 존슨(4605개)과 로저 클레멘스(4604개)도 5천탈삼진 돌파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밖에 11번의 삼진왕, 6번의 300K 시즌, 15번의 200K 시즌, 24번의 100K 시즌, 23시즌 연속 100K, 215번의 10K 경기, 한 시즌 23번의 10K 경기, 양 리그 2000K, 양 리그 9구 3삼진 등 탈삼진에 관한 수많은 기록이 라이언의 차지다. 그에게 삼진을 당한 타자 명단에는 21명의 명예의 전당 선수와 47명의 리그 MVP, 그리고 다섯쌍의 부자 선수가 들어 있다.

라이언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안타를 뽑아내기가 가장 어려웠던 투수다. 라이언이 통산 5386이닝에서 기록한 .204의 피안타율은 샌디 코우팩스가 2324이닝에서 기록한 .205를 넘는 역대 1위다(3위는 2646이닝 .209의 페드로 마르티네스).

라이언은 남들은 한 번 하기도 힘든 노히트노런을 7번이나 달성했다. 2위 코우팩스보다도 3번이 더 많다. 12번의 1안타 완봉승 역시 밥 펠러와 함께 타이기록. 은퇴 당시 라이언은 무려 53개의 메이저리그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27시즌을 뛴 라이언보다 더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한 사람은 없다. 조 토레에게 결승홈런을 맞고 패전투수가 된 첫 경기에서의 나이는 만 19세223일이었으며, 댄 호위트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내려간 마지막 경기에서의 나이는 만 46세234일이었다.

라이언은 재키 로빈슨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3팀에서 영구결번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에인절스 30번, 휴스턴-텍사스 34번). 98.79%의 명예의 전당 득표율은 톰 시버(98.84%)에 이은 역대 2위에 해당된다(현재는 4위). 497명의 투표권자 중에서 라이언의 이름을 적지 않은 사람은 6명뿐이었다.

볼넷의 제왕
라이언은 분명 화려한 투수였다. 하지만 동시대의 톰 시버나 짐 파머만큼 든든하지는 않았다. 라이언은 역사상 가장 많은 2795개의 볼넷을 내줬으며 8번이나 최다볼넷 1위에 올랐다. 2위 스티브 칼튼(1833개)과는 무려 962개 차이다.

한 시즌 200개 이상의 볼넷을 내준 2명(밥 펠러) 중 한 명이며, 200볼넷을 2번 기록한 유일한 한 명이다. 너클볼러 필 니크로(226)보다도 더 많은 폭투를 기록했다(277개 1위). 이것은 라이언이 볼넷보다 안타를 더 싫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9이닝당 통산 4.7개의 볼넷은 에이스로서는 심각한 결격 사유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구력이 크게 좋아진 펠러와 달리 라이언의 제구력 문제는 그가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 계속됐다.

많은 볼넷 때문에 라이언의 통산 조정 방어율은 112에 불과하며(시버 127) WHIP은 역대 최고의 피안타율을 기록하고도 1.25에 달했다(시버 1.12). 7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지만 퍼펙트게임은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다. 라이언이 노히트노런 7경기에서 내준 볼넷은 26개로(삼진 94개) 그 중 4번은 1회부터 허용했다.

라이언의 통산 승률은 5할을 약간 넘는 .526. 1900년 이후 데뷔한 투수 중 가장 많은 292패를 기록한 탓이다. 라이언의 +32는 기자투표를 통해 명예의 전당에 오른 30명의 선발투수 중 테드 라이언스(260승230패) 다음으로 적다. 이에 칼튼이 4차례, 시버가 3차례 사이영상을 따낸 반면, 매년 많은 패수를 기록한 라이언은 1개의 사이영상도 따내지 못했으며 2위 1번과 3위 2번에 그쳤다.

승률 .492 팀에서 고군분투한 월터 존슨, 승률 .500 팀에서 뛰었던 시버처럼, 라이언이 뛴 팀의 승률 역시 .503에 불과하다. 하지만 존슨이 팀 승률보다 1할7리, 시버가 1할3리가 높은 개인 승률을 기록한 반면, 라이언은 고작 2푼3리가 높았을 뿐이다. 시버의 통산 성적을 162경기 평균으로 환산하면 16승10패가 되지만, 라이언은 13승12패에 불과하다. 라이언의 또 다른 별명은 '5할 투수'였다.

하지만 라이언의 피칭은 그 누구보다도 재미있고 통쾌했다. 연거푸 볼넷을 내줘 위기에 몰리는가 싶다가도 신기의 삼진쇼로 위기에서 탈출,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본 팬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안겨줬다. 팬들은 그런 약점이 있는 라이언을 더 사랑했고 더 응원했다.

강속구의 제왕
라이언이 던진 구질은 단 3개. 100마일(161km)에 육박한 강속구와 최고 89마일(143km)까지 나왔던 파워커브, 85마일(137km)에 이르렀던 체인지업이다. 특히 라이언의 커브는 보통의 다른 커브와 달리 손목을 심하게 비트는 동작이 없어 롱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라이언이 기록한 최고구속은 1974년에 찍은 100.9마일(162.4km). 하지만 위력은 스피드건에 찍히는 것 이상이었다. 한번은 공이 포수 미트의 포켓을 찢고 백스톱까지 날아가 보는 사람들을 깜짝 놀래킨 적도 있었다.

라이언의 진정한 위력은 경기의 마지막 순간까지 강속구를 던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피처스 바이블(Pitcher's Bible)'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1980년에서 1988년 사이 라이언 패스트볼의 평균 구속은 8회(94.6마일)가 가장 높았으며, 그 다음이 9회(94.5마일)였다. 라이언은 마흔이 넘은 후에도 95마일 이상의 강속구를 뿌렸다.

라이언은 자신의 강속구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시버가 틈날 때마다 달렸던 것처럼, 라이언은 하루에 몇 시간씩 자전거를 탔다(역시 끊임없이 달려 시버급의 허벅지를 만들었던 박찬호는 허리 부상 후 텍사스에서 자전거를 탔다. 하지만 자전거 타기는 박찬호에게 맞지 않았다). 라이언 심지어 완투한 후에도 웨이트 트레이닝장에서 몇 시간씩 자전거를 타 기자들을 애먹이기도 했다.

라이언은 겨우내 상상을 초월하는 훈련량을 소화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라이언의 겨울 훈련은 시즌이 끝나면 시작돼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계속됐다.

라이언의 또 다른 문제는 선수 생활 내내 그를 괴롭혔던 만성적인 손가락 물집 부상이었다(공교롭게도 조시 베켓이 이를 물려받았다). 라이언은 이를 위해 손가락을 피클이나 과일주스에 담그는 자신만의 단련법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물집 부상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제왕의 등장
영화 < Von Ryan's Express >가 개봉된 1965년은 처음으로 신인 드래프트가 열린 해다. 이 드래프트에서 라이언은 뉴욕 메츠에 12라운드 226순위 지명에 그쳤다. 라이언은 고교 시절부터 스피드건에 100마일을 찍었지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스카우트들은 대부분 구제불능의 제구력에 고개를 저으며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톰 시버와 제리 쿠스먼이라는 최고의 영건 원투펀치를 보유하고 있었던 메츠는 라이언을 팀의 미래로 생각하지 않았다. 1970년 라이언은 15K의 팀 타이기록을 세우며 주목을 받는 듯했다. 그러나 4일 후 시버는 19K의 메이저리그 타이기록을 작성했다. 라이언은 시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데뷔 4년째인 1971년, 라이언은 152이닝에서 116개의 볼넷을 내줬고 10승14패 방어율 3.97에 그쳤다(리그 평균 방어율 3.91).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고 뉴욕 생활도 맞지 않았다. 야구를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마음을 바꿔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메츠는 결국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서 올스타 유격수 짐 프레고시를 데려오면서 내준 4명에 라이언의 이름을 집어넣었다(프레고시는 1979년 에인절스 감독에 부임해 라이언과 만난다).

메츠와 달리 창단 후 스타 부재에 시달렸던 에인절스는 라이언에게 온 정성을 쏟았다. 톰 모건 투수코치와 베테랑 포수 제프 톨버그가 달려들어 라이언 개조에 나섰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에인절스에서의 첫 해였던 1972년, 라이언은 역대 4위에 해당되는 329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아메리칸리그에서는 1948년 펠러의 348삼진 이후 26년만에 나온 300K였다. 1973년 라이언은 다시 383개로 코우팩스가 1965년에 세운 382개 최고기록을 갈아치웠다. 2년 연속 300K 역시 역대 최초였다. 1974년에는 2번의 19K를 작성해 시버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노히터 행진도 시작됐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 3년간 4번을 쓸어담아 코우팩스의 최고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1973년 시즌 2번째 노히트노런에서는 마지막 타자 놈 캐시가 라이언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방망이 대신 부러진 테이블 다리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그 다음 경기에서 라이언은 8회에 안타를 맞아 자니 반더 미어에 이은 역대 2번째 '2경기 연속 노히트노런'이자 역대 최초의 '한 시즌 3회 달성'이라는 대기록을 놓쳤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의 6년간, 라이언은 선발로 223경기에 나서 125번 완투를 했다. 승패를 기록하지 않은 경기는 단 17경기였다(112승94패). 그 6년간 에인절스는 6팀짜리 지구에서 4위 2번, 5위 2번, 6위 2번에 그쳤다.

100만달러짜리 선수
1979시즌 후 FA 자격을 얻은 라이언은 역대 최초의 100만달러 연봉을 요구했다. 하지만 버지 바바시 단장(빌 바바시의 아버지)은 마지막 2년간 26승27패에 그친 라이언을 잡지 않기로 했다. 대신 라이언의 고향팀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그의 요구를 들어줬다. 라이언은 휴스턴과 역사적인 3년간 350만달러 계약을 맺었다.

에인절스에서의 8년간, 라이언은 탈삼진 1위에 7번 올랐다. 1975년의 팔꿈치 부상만 아니었다면 8년 연속 1위이자 6년 연속 300K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 8년간 라이언은 2번의 200볼넷과 함께 볼넷 1위에도 6번 올랐다. 2번은 2위였다.

휴스턴에서의 첫 해였던 1980년, 라이언은 세자르 헤로니모를 상대로 3천탈삼진을 달성했다. 헤로니모는 밥 깁슨에게도 3천탈삼진의 제물이 됐던 선수다. 1981년에는 5번째 노히트노런을 달성, 코우팩스를 제치고 단독 1위에 나섰으며, 사이 영과 짐 버닝에 이은 역대 3번째로 양 리그 노히트노런 작성자가 됐다. 그리고 그해 처음이자 마지막 1점대 방어율(1.69)로 리그 1위에 올랐다.

1982년 라이언은 칼튼보다 2주 빨리 3509삼진의 월터 존슨을 넘어섰으며, 1985년에는 사상 최초로 4천탈삼진을 달성했다. 1987년에는 최초로 양 리그 모두에서 2천탈삼진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1987년 만 40세의 라이언은 방어율(2.76)과 탈삼진(270)에서 리그 1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해 휴스턴 타선이 9이닝당 3.15점을 지원해주는 바람에 8승16패에 그쳤다. 그럼에도 라이언은 사이영상 투표에서 5위에 올랐다.

1988시즌을 마지막으로 휴스턴에서의 9시즌을 마감한 라이언은 다른 텍사스주 팀인 텍사스 레인저스의 러브콜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라이언은 1962년에 창단한 메츠, 1961년에 창단한 에인절스, 1962년에 창단한 휴스턴에 이어 다시 1961년에 창단한 텍사스에서 뛰게 됐다. 텍사스에서의 첫 해였던 1989년, 라이언은 42세의 나이로 6번째이자 마지막 300K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8월23일 대망의 5천번째 탈삼진을 잡아냈다. 제물은 리키 헨더슨이었다.

라이언의 항해는 계속됐다. 1990년에는 6번째 노히트노런을 따내고 마지막 탈삼진왕에 올았으며, 1991년에는 로베르토 알로마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7번째이자 마지막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알로마는 첫번째 노히트노런 당시 라이언의 2루수였던 샌디 알로마의 아들이었다. 그 해 라이언은 44세의 나이로 방어율 5위(2.91)와 탈삼진 3위(203)에 올랐다.

1993년 은퇴 선언과 함께 라이언의 마지막 시즌이 시작됐다. 그리고 가장 유쾌한 장면 중 하나가 만들어졌다. 8월5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전. 46살의 라이언은 자신에게 달려든 26살의 로빈 벤추라를 가볍게 헤드락으로 제압한 다음 '꿀밤 6연타'를 날렸다. 벤추라로서는 포수 이반 로드리게스가 말려준 게 다행이었다.

9월22일 시애틀 매리너스전. 라이언은 통산 773번째이자 마지막 선발 등판에 나섰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라이언이 383삼진을 달성한 해에 데뷔했던 켄 그리피의 아들이 3번을 치고 있었다. 1회 마운드에 오른 라이언은 안타-볼넷-볼넷-밀어내기 볼넷 후 만루홈런을 맞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공은 98마일짜리 강속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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