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좌완 레프티 그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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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전 출생자는 사이 영과 월터 존슨을 포함해 7명. 데드볼 시대를 보낸 덕분에 많은 승리를 챙길 수 있었다. 반면 1900년부터 1919년 사이에 태어난 300승 투수는 단 1명. 이들이 뛴 1930년대 타자들의 공격력은 역대 최고였다.
1930년대 아메리칸리그 팀의 경기당 평균득점은 5.25로, 이는 지난 7년간 아메리칸리그 팀이 기록한 4.88보다 0.5 가까이 높다. 시즌 최다타점 1위부터 11위까지 기록 중 9개가 1930년대에 몰려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나머지는 1921년 베이브 루스와 1927년 루 게릭). 그만큼 투수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루스, 게릭, 지미 팍스, 행크 그린버그, 조 디마지오와 같은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최고 타자들을 추풍낙엽으로 만들었던 유일한 투수가 있다. 역대 최고의 좌완투수 레프티 그로브다. 1924년 11번째 달성자 피트 알렉산더와 1961년 13번째 달성자 워렌 스판 사이에 나온 300승은 그로브가 유일하다.
1900년에 태어난 그로브는 1925년부터 1941년까지 17년간 616경기에 나서 300승141패 방어율 3.06 2266삼진을 기록했다. 300승 투수 중에서는 그다지 돋보이지 않는 성적이다. 하지만 그로브가 363승의 스판, 300승-4000K의 스티브 칼튼, 황금의 5년을 보낸 샌디 코우팩스, 4500K의 랜디 존슨을 제치고 역대 최고의 좌완으로 꼽히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로브는 17시즌의 절반을 넘는 9시즌에서 방어율 리그 1위에 올랐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그보다 더 많이 1위를 차지한 투수는 없다. 4년 연속 방어율 1위(1929~1932)도 코우팩스의 5년(1962~1966)에 이은 2위에 해당된다.
7회 - 로저 클레멘스
5회 - 크리스티 매튜슨, 월터 존슨, 샌디 코우팩스, 페드로 마르티네스
4회 - 피트 알렉산더, 그레그 매덕스, 랜디 존슨
그로브의 통산 조정방어율(148)은 월터 존슨(146)을 넘어선 300승 투수 1위. 페드로 마르티네스(160)가 그로브를 제치기 위해서는 94승을 더 올려야 한다. 그로브는 17시즌 중 11시즌에서 조정방어율이 150을 넘었다(마르티네스는 14시즌 8회). 통산 조정방어율이 131인 코우팩스는 '황금의 5년' 동안은 평균 168을 기록했는데, 그로브의 1928년부터 1932년까지의 5년 평균은 174다.
그로브는 14명이 이름을 올린 3000K를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1925년부터 1931년까지 기록한 7년 연속 탈삼진 1위는 랜디 존슨(5년 연속)과 놀란 라이언(4년 연속)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역사상 한 이닝을 공 9개,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끝낸 경험이 있는 투수는 김병현(2002년 필라델피아전)을 포함해 37명이다. 하지만 2차례 기록한 선수는 그로브, 코우팩스, 라이언뿐이며, 투수가 포함되지 않은 2번은 그로브뿐이다. 그로브는 9회말 공 10개로 베이브 루스-루 게릭-밥 뮤젤을 모두 삼진으로 잡아낸 적도 있다.
역사상 2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투수는 알렉산더(1915-1916) 그로브(1930-1931) 코우팩스(1965-1966) 클레멘스(1997-1998)의 4명. 그로브는 클레멘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일한 아메리칸리그 달성자였다. 승률 1위에 가장 많이 올라본(5회) 투수이기도 한 그로브는 300승 투수 중 통산 승률(.680) 1위에도 올라 있다(2위 크리스티 매튜슨 .665). 마르티네스(.691)가 그로브를 넘기 위해서는 앞으로 94승48패 이상의 성적을 추가해야 한다.
하지만 괘씸죄로 인한 마이너리그 강등과 2차대전 참전으로 4시즌을 놓친 스판처럼, 그로브에게도 '잃어버린 4년'이 있다.
1900년 메릴랜드주에서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로브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탄광에서 일한 탓에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이에 평생을 문맹으로 보낸 그로브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고무도장을 갖고 다녔다.
틈날 때마다 돌멩이를 던져 어깨의 힘을 기른 그로브가 정식으로 야구를 시작한 것은 17살 때 광부 팀에 입단하면서. 감독은 포수가 그의 공을 담당하지 못하자 1루수를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브의 타격 실력은 영 형편없었다. 그로브는 메이저리그 통산 1369타수에서 593번의 삼진을 당했는데 이는 역대 타자, 투수를 통틀어 최고의 삼진 비율(43%)이다.
1919년 19살의 나이로 세미 프로 팀에 입단한 그로브는 이듬해 시즌 중반, 인터내셔널리그 팀인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구단주 잭 던의 눈에 띄였다. 던은 1914년에도 19살의 베이브 루스를 사들여 곧바로 보스턴 레드삭스에 되팔았지만 그로브는 놔주지 않았다. 실력이 너무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던이 찾아온 메이저리그 팀들을 계속 돌려보내는 사이 4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로브는 매년 300이닝 이상을 던지며 121승(38패)을 올렸고 팀의 리그 7연패를 이끌었다. 시범경기에서 만난 루스에게는 11타수 무안타 9삼진의 치욕을 안기기도 했다.
1925년 던이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는 파격적인 제안이 마침내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현 오클랜드)의 구단주 겸 감독인 코니 맥으로부터 왔다. 맥의 제안은 10만600달러. 1920년 뉴욕 양키스가 루스를 데려가면서 보스턴에 준 10만달러보다도 많았다. 던이 그로브를 데려오면서 세미 프로 팀에 지불했던 돈은 3500달러로, 결국 던은 그로브를 통해 121승+9만7천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25살의 나이로 데뷔한 그로브는 첫 해 부상으로 고전하면서도 조지 시슬러의 35경기 연속 안타에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이듬해 방어율-탈삼진 1위를 시작으로 탈삼진 7연패와 5번의 방어율 1위를 질주했다. 만약 루스처럼 곧바로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었다면 그로브는 300승이 아닌 400승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로브의 주무기는 당대 최고로 꼽힌 불같은 강속구였다. 월터 존슨은 1920년 어깨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첫 13년간 오로지 직구만 던졌는데, 그로브 역시 첫 9년간 직구만 던졌다. 하지만 존슨이 직구만 던진 13년은 모두 데드볼 시대로, 라이브볼 시대에 '사나이는 직구'를 외쳤던 투수는 사실상 그로브가 유일하다.
그의 성격은 강속구만큼이나 불같았다. 그로브는 아쉬운 패전을 당할 때마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덕아웃과 라커룸에서 난동을 피웠는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집어던지는 그를 선수들은 물론 감독조차 말리지 못했다. '돌+아이' 모드의 그로브는 진정하라면서 다가온 맥 감독의 멱살을 잡고 욕을 퍼붓기도 했다.
1928년(24승8패 2.58) 방어율에서 3위, 1929년(20승6패 2.81) 다승에서 3위에 그쳐 트리플 크라운을 놓친 그로브는 1930년(28승5패 2.54) 기어코 3관왕에 올랐다. 그로브는 선발 등판 사이 18차례 구원등판에도 나섰는데, 훗날 계산해보니 9세이브로 세이브 역시 리그 1위가 나왔다. 통산 159번의 구원등판(55세이브) 역시 그의 승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31년(31승4패 2.06)의 그로브는 2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과 함께 완투와 완봉에서도 1위에 올랐다. 그리고 처음으로 지금과 같은 기자투표로 치러진 MVP 투표에서 게릭(.341 46홈런 184타점)을 제쳤다. 그로브의 31승은 1968년 데니 매클레인(31승)이 나타나기 전까지 아메리칸리그의 마지막 30승이었다. 그로브는 실책 때문에 17연승의 당시 아메리칸리그 최고기록 경신에 실패했는데(덕아웃이 난장판이 됐음은 물론이다) 1930년 7월25일부터 1931년 9월24일까지 1년2개월 간 46승4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1933년(24승8패 3.20) 그로브는 양키스가 꼬박 2년을 걸려 만들어낸 '309경기 연속 무 완봉패'를 중단시켰다. 하지만 1933년은 그로브가 어슬레틱스에서 뛴 마지막 해이자 마음껏 강속구를 뿌린 마지막 해였다. 대공황에 위기를 느낀 맥은 시즌 후 보스턴에 그로브를 넘겼다. 당시 보스턴은 해리 프레지라는 '나쁜 구단주'가 톰 야키라는 '좋은 구단주'로 바뀐 상황이었다. 맥이 주전 2루수 맥스 비숍, 노장 투수 루브 월버그와 함께 그로브를 보내고 받은 대가는 선수 2명과 함께 현금 12만5000달러였다.
그로브는 보스턴 입단 첫 해 어깨를 다쳤고 강속구를 잃었다. 그러자 존슨이 그랬던 것처럼 그제서야 그동안 던지지 않았던 리그 최고 수준의 커브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포크볼까지 추가했다. 그로브는 이후 탈삼진 1위에는 더 이상 오르지 못했지만, 방어율 1위는 4번을 차지했다. 수비수의 실책에도 마음을 다스리는 장면을 보면서 맥 감독은 "이제서야 진짜 투수가 됐구먼"이라며 웃었다. 1941년 7월 그로브는 300승 투수가 됐고 더 이상 공을 던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