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타격의 신은 장효조? 양준혁? 믈브는 단 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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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윌리엄스(1918~2002).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히터(hitter)였다.
윌리엄스는 1939년부터 1960년까지 22년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만 보내며 통산 2654안타 타율 .344(7위) 521홈런 1839타점(13위) 2021볼넷(4위)을 기록했다. 아메리칸리그에서 2번의 트리플 크라운을 석권한 유일한 타자이며(NL 유일은 로저스 혼스비) 6번의 타격왕과 함께 홈런과 타점 타이틀을 4번씩 차지했다.
또한 출루율에서 11번, 장타율과 OPS에서 9번씩 1위에 올랐으며, 출루율(.482)에서 역대 1위(2위 베이브 루스 .474), 장타율(.634)에서 역대 2위(1위 루스 .690), OPS(1.116)에서 역대 2위(1위 루스 1.164)를 지키고 있다. 타율은 역대 7위이지만 앞선 6명은 모두 1920년 이전에 데뷔한 선수들이다. 거의 5시즌에 달한 '자발적 군복무'의 공백이 없었다면, 3500안타 2700볼넷(1위 배리 본즈 2558) 700홈런 2500타점(1위 행크 에런 2297)을 기록했을 수도 있다.
윌리엄스는 타격(hitting)과 사랑에 빠진 남자였다. 그는 자칭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어려운' 타격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 윌리엄스는 호텔방에서조차 파자마 차림으로 방망이를 휘둘러 룸메이트의 수면을 방해했으며, 방망이가 없으면 다른 비슷한 것을 찾아내 어떻해든 스윙 연습을 했다(군대에서도 그랬다). 또한 캴 야스트렘스키의 증언처럼 '증권 거래인이 경제 공부를 하듯' 타격 이론에 대해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결국 그의 노력은 .344의 타율과 함께 역작 'The Science of Hitting'으로 남았다.
윌리엄스 방망이에는 하얀 띠가 둘러져 있었다. 정확히 중심부(sweet spot)에만 공을 맞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망이를 부러뜨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윌리엄스는 '방망이의 달인'이었다. 한 번은 자신이 주문한 방망이 중 하나를 손에 쥐어보자마자 돌려보냈는데, 두께를 다시 재보니 윌리엄스가 정한 기준에 0.1mm가 모자랐다. 14g씩 차이가 나는 방망이 6개의 무게 순위를 매기는 테스트를 통과한 적도 있었다. 부모의 무관심 속에 외롭게 자란 윌리엄스는 방망이를 품에 안고 잤고, 교실에서도 식당에서도 언제나 방망이와 함께했다.
윌리엄스가 마이너리그 때 만난 로저스 혼스비는 레벨 스윙의 전도사였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공을 약간 올려치는 게 옳다고 믿어 미세한 어퍼컷 스윙을 완성했다. 조 모건에 따르면, 1997년 토니 그윈은 윌리엄스로부터 어퍼컷 스윙으로 바꿔보라는 조언을 듣고 실행했다. 그 해 37살의 그윈은 데뷔 16년 만에 처음으로 100타점을 만들어냈고 생애 최고의 장타율(.547)을 기록했다. 한편 윌리엄스는 생전 자신의 스윙에 가장 가까운 선수로 라파엘 팔메이로를 꼽았다.
하늘이 내려준 선물도 있었다. 뛰어난 시력이었다. 그의 시력을 검사한 해군 군의관은 윌리엄스의 시력이 10만 명 중에 6명 나오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윌리엄스는 혼스비처럼 시력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최대한 피했으며(카메라 플래시도 무척 싫어했다) 건강을 위해 물과 우유만 마셨다.
윌리엄스는 '날아오는 공의 상표까지도 읽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놀라운 선구안을 자랑했다(물론 사실은 아니었지만). 데뷔 첫 해 기록한 64개를 제외하면 한 번도 55개 이상의 삼진을 당하지 않았으며, 3할 타율에 실패한 것도 단 한 시즌(40세 시즌)이었다. 또한 윌리엄스는 대단한 인내심의 소유자였다. 배리 본즈(2558) 리키 헨더슨(2190) 베이브 루스(2062)가 그보다 더 많은 볼넷을 얻어냈지만, 타석당 볼넷수는 윌리엄스가 1위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괴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관중에게 침을 뱉고 관중석에 방망이를 집어던지는 등 선수 생활 내내 팬, 매스컴과 충돌했다. 정말 끔찍이도 싫어했던 기자들에게는 '키보드의 기사(knight of keyboard)'라는 별명도 지어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린이 암환자를 돕는 등 사회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모든 이들과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다
샌디에이고에서 태어나 자란 윌리엄스는 17살 때 퍼시픽코스트리그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입단했다. 윌리엄스를 발견한 사람은 명예의 전당 2루수 에디 콜린스로, 콜린스는 당시 보스턴의 스카우트를 맡고 있었다. 1939년 윌리엄스는 콜린스를 따라 서부 끝에서 동부 끝으로 이동하는 긴 여행을 했다.
윌리엄스는 양키스타디움에서 명예의 전당 투수 레드 러핑으로부터 2루타를 뽑아내는 것으로 메이저리그 첫 안타를 신고했고 .327 31홈런 145타점의 화려한 성적으로 신인 최초의 타점왕이 됐다. '키드(The Kid)'의 놀라운 활약은 그 해 처음 시작된 TV 중계를 통해 전국으로 전해졌다.
어느날 윌리엄스는 결정적인 홈런을 날린 후 환호하는 홈 관중들에게 모자를 벗어 답례했다. 하지만 다음날 보스턴 신문들은 윌리엄스를 건방지다고 힐난했다. 이후 윌리엄스는 어떤 환호에도 절대로 모자를 벗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불거진 언론과의 갈등은 특히 보스턴 신문이 1942년 부모의 이혼과 형의 투옥 등 윌리엄스의 가정사를 지상중계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윌리엄스의 첫 시즌이 끝난 후, 보스턴은 우측 펜스 앞에 불펜을 만들어 사실상 펜스를 앞으로 당겼다. 1940년 .344 23홈런 113타점으로 2년차 부진(?)을 겪은 윌리엄스는, 3년차인 1941년을 최고의 시즌으로 만들었다. 올스타전에서 날린 9회말 역전 끝내기 3점홈런은 그 예고탄이었다.
윌리엄스는 마지막 날 더블헤더를 앞두고 타율 .39955를 기록 중이었다. 이대로 시즌을 끝내면 4할로 인정받는 상황. 하지만 윌리엄스는 쉬라는 조 크로닌 감독의 권유를 뿌리치고 2경기에 모두 나서 .406라는 당당한 4할을 만들었다. 6안타(8타수)는 모두 처음 상대하는 좌투수들로부터 뽑아낸 것들. AL에서는 1923년 해리 헤일만, ML에서는 1930년 빌 테리 이후 처음 나온 4할이었으며, 윌리엄스 이후에는 67년째 나오지 않고 있다. 한편 당시는 희생플라이가 타수에 포함됐는데, 지금의 방식으로 환산하면 윌리엄스의 타율은 .412가 된다.
또한 윌리엄스는 .553의 출루율을 기록, 1899년 존 맥그로의 .548를 넘어서는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는 2002년 배리 본즈가 .582를 기록할 때까지 61년간 유지됐다(본즈는 2004년에는 .609로 최초의 6할 출루율을 만들어냈다). 윌리엄스는 147개의 볼넷을 얻어낸 반면 삼진은 27개밖에 당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MVP는 윌리엄스의 것이 아니었다. 1941년은 조 디마지오가 56경기 연속 안타를 달성한 해였다. 팬들은 윌리엄스의 4할보다 디마지오의 연속 안타에 더 열광했다. 둘은 같은 날(5월15일) 안타 행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디마지오가 56경기까지 간 반면 윌리엄스는 23경기에서 그쳤다. 이것이 생애 최고 기록일 정도로 연속 경기 안타와는 인연이 없었던 윌리엄스는, 대신 16타석 연속 출루(배리 본즈 타이)와 84경기 연속 출루 기록을 가지고 있다.
방망이를 놓고 조종간을 잡다
1942년 윌리엄스는 .356 36홈런 137타점으로 생애 첫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다. 아메리칸리그에서는 1934년 루 게릭 이후 처음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MVP 투표에서는 .322 18홈런 103타점을 기록한 뉴욕 양키스의 2루수 조 고든에게 밀려 2년 연속으로 2위에 그쳤다. 둘의 OPS 차이는 .247였다.
윌리엄스는 1943년 2차대전에 참전, 꼬박 3년을 해군에서 콜세어기 비행 교관으로 복무했다. 만 24세에서 26세 시즌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 윌리엄스는 징집대상자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이혼한 어머니를 부양할 수 있는 돈을 모았다'며 참전을 선언했다. 전쟁 막바지, 윌리엄스는 전장 투입을 앞두고 있었지만, 진주만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이 전쟁이 끝났다.
1946년 윌리엄스는 돌아오자마자 .342 38홈런 123타점을 기록했다. 3년의 공백은 그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윌리엄스는 올스타전에서 2번째 명장면을 연출했다. 지상에서 7m까지 솟았다가 스트라이크존 위를 살짝 통과하는 립 서웰의 마구 '이퓨스(eephus)'를 통타, 펜웨이파크의 담장을 넘겨버린 것. 타석의 맨 앞에 섰던 윌리엄스는 훗날 부정 타격이었음을 고백했다.
1946년은 '윌리엄스 쉬프트'가 탄생한 해이기도 하다. 클리블랜드의 루 부드루 감독은 더블헤더 1차전에서 윌리엄스에게 호되게 당한 후(3홈런 8타점), 2차전에서 오로지 당겨치는 그를 상대로 좌익수를 제외한 모든 야수를 필드의 오른쪽에 배치하는 파격적인 수비 포메이션을 선보였다. 투수가 승부를 피한 탓에 첫 실험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얼마 후 다시 만난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타구를 왼쪽 허허벌판으로 날려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장내홈런을 만들어냈다. 팀의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한방이었다.
리그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은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를 만났다. 보스턴은 세인트루이스가 브루클린 다저스와 원게임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동안 경기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아메리칸리그 올스타와 연습경기를 가졌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윌리엄스는 그 경기에서 팔꿈치에 공을 맞았고, 퉁퉁 부은 팔꿈치로 월드시리즈에 임했다. 세인트루이스는 윌리엄스를 상대로 과감히 쉬프트를 사용했다. 윌리엄스는 .200로 부진했고 보스턴은 7차전 끝에 패했다.
윌리엄스는 이후 유니폼을 벗을 때까지 더 이상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지 못했다. 이후 거의 모든 팀들이 윌리엄스를 상대로 쉬프트를 사용했다. 그럼에도 윌리엄스는 오로지 당겨치는 고집을 끝까지 꺾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밀어치기를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947년 윌리엄스는 .343 32홈런 114타점으로 2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다. 하지만 MVP 투표에서는 .315 20홈런 97타점을 기록한 디마지오에게 1점 차로 패했다. 양키스가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보스턴이 3위에 그친 것과 함께 기자들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윌리엄스 대신 온화한 디마지오를 선택했다. 특히 한 보스턴 기자가 윌리엄스에게 10위 표도 주지 않은 것이 결정적이었는데, 그 기자는 스프링캠프 때 윌리엄스에게 욕을 먹은 것에 대한 복수를 했다.
1948년 .369로 2연패에 성공한 윌리엄스는 이듬해 .343 43홈런 159타점으로 홈런과 타점에서 개인 최고 기록을 세우며 2번째 MVP를 따냈다. 하지만 타율에서는 1모 차이로 조지 켈에게 1위를 내줘 타격왕 3연패와 사상 최초가 될 수 있었던 '2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이 무산됐다. 역시 마지막 날 출장을 강행했지만 무안타에 그쳐 역전을 당한 것이었다(켈 .3429, 윌리엄스 .3428).
1939년부터 1949년까지 군복무 3년을 제외한 8시즌 동안, 윌리엄스는 매시즌 100타점을 넘겼으며 평균 33홈런 137볼넷을 기록했다. 7년 연속 출루율 1위와 6년 연속 장타율 1위를 지켰으며, MVP 투표에서는 1위에 2번, 2위에 3번, 3위에 1번, 4위에 1번 올라 한 시즌(2년차)을 제외하고는 모두 4위 내에 들었다.
2번째 참전, 38번의 출격
1950년 보스턴과 윌리엄스는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코미스키파크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랄프 카이너의 타구를 잡다 펜스에 부딛혀 팔꿈치를 다쳤다. 윌리엄스는 이 부상으로 60경기를 결장했고 타율도 생애 최저인 .317로 떨어졌다. 양키스와 우승 경쟁을 했던 보스턴은 결국 4경기 뒤진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 부상은 이후 윌리엄스의 고질병으로 남았다.
윌리엄스가 다시 .318로 1951년을 마치자 그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냐는 술렁임이 일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이를 뒤로 하고 1952년 다시 한국전 참전을 선언했다. 4월30일 보스턴은 다시 군복을 입게 되는 윌리엄스를 위해 '테드 윌리엄스 데이'를 정했다. 이날 윌리엄스는 디지 트로트로부터 통산 324호 홈런을 뽑아냈다. 많은 사람들은 윌리엄스가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차대전 때와 달리 전투기 조종사로 전장에 투입된 윌리엄스는 대공포에 맞아 동체 착륙을 하기도 했다. 귀에 이상이 생기기 전까지 38번 출격에 나섰던 윌리엄스는 전투기를 조종하는 소감에 대해 "이제는 내가 미키 맨틀보다 빠르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이듬해 8월에 돌아온 34살의 윌리엄스는 스프링캠프를 포함해 전혀 훈련을 하지 못했음에도 복귀 2번째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내는 등 37경기에서 .407-509-901 13홈런 34타점을 기록, 건재함을 알렸다.
1954년 윌리엄스는 .345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규정타수에 14타수가 모자라 .341를 기록한 바비 아빌라에게 타격왕 타이틀을 내줬다. 이는 큰 논란을 몰고와 결국 규정타수는 규정타석으로 바뀌었다. 윌리엄스는 1955년에도 .356를 기록했지만 부상으로 56경기를 놓쳤다. 1956년에는 복귀 후 가장 많은 136경기에 출전하며 .345를 기록했지만 미키 맨틀(.353)에 뒤져 2위에 그쳤다.
1957년은 39살인 윌리엄스가 마지막 불꽃을 태운 해였다. 윌리엄스는 다시 한번 4할 타율에 도전했지만 .388에 그쳐 5번째 타격왕을 차지한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10년 전과 달리 그에게는 내야안타 5개를 만들어낼 발이 없었다. 윌리엄스는 MVP 투표에서도 맨틀에게 밀려 또 2위에 그쳤다. 그의 2위 4번은 모두 양키스 선수들(디마지오2, 고든1, 맨틀1)에게 밀린 것이다. 1958년 윌리엄스는 .328로 2연패에 성공했다. 통산 6번째 타격왕이자 3번째 2연패였다.
1959년 41살의 윌리엄스가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에 실패하자(.254) 톰 야키 구단주는 은퇴를 종용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리고 이듬해 .316를 기록한 후에야 비로소 옷을 벗었다. 윌리엄스는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통산 521번째 홈런을 날렸다. 마지막 홈런임을 알고 있었던 펜웨이파크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고개를 숙인채 묵묵히 그라운드를 돌았으며 여전히 답례를 하지 않았다.
은퇴 후 어부 생활을 했던 윌리엄스는 1966년 93.38%의 높은 투표율로 명예의전당에 입성했다. 헌액식에서 윌리엄스는 명예의 전당이 니그로리그 선수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언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1969년 윌리엄스는 워싱턴 세너터스(현 텍사스)의 감독을 맡아 팀을 리그 꼴찌에서 지구 4위로 끌어올리며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다. 하지만 감독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윌리엄스는 1972시즌 후 해임됐으며 이후 다시는 감독을 맡지 않았다.
화해의 악수를 청하고 떠나다
1991년 펜웨이파크에서 열린 테드 윌리엄스 데이. 윌리엄스는 "나는 팬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며 절대로 모자를 벗지 않겠다는 평생의 고집을 꺾었다. 윌리엄스가 벗어 답례한 모자는 그가 무대에 오르기 전 한 보스턴 선수로부터 빌린 것이었다.
2002년 6월5일, 윌리엄스는 8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윌리엄스는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자신을 둘러싼 기자들에게 자신의 꿈이야기를 했다.
꿈에서 난 랜디 존슨을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지. 덕아웃에서 동료들이 외쳤어. 상대는 랜디 존슨이야. 밀어쳐야 한다고. 난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어. 하지만 난 한 번도 밀어쳐본 적이 없는 걸.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어.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초구가 날아왔고 난생 처음으로 밀어쳤지. 결과가 어땠는지 알아? 깨끗한 좌전안타였어.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