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믈브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로빈슨을 등용한 사람이 누군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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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6월29일(이하 한국시간) 뉴욕 힐탑파크에서 벌어진 뉴욕 하이랜더스(현 양키스)와 워싱턴 세너터스(현 미네소타)의 경기. 도루를 막지 못해 쩔쩔매는 하이랜더스의 포수에게 홈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이날 '1경기 13도루 허용'이라는 메이저리그 기록을 세운 스물다섯 살 포수는, 결국 시즌 후 유니폼을 벗었다. 통산 120경기 .239 3홈런 39타점.

그로부터 40년 후인 1947년 4월16일. 예순다섯 살이 된 그 포수는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바꾼 사건 하나를 만들어낸다. 인종의 벽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험한 도전이었던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재키 로빈슨이다. 하지만 이를 기획하고 로빈슨을 캐스팅한 '연출자'는 브랜치 리키였다. 재키 로빈슨 데뷔 63주년을 맞아 <야구계의 링컨> <야구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마하트마> <혁명가> 등으로 불리는 리키의 생애를 돌아봤다.

리키는 언제나 '생각 중'
1881년 오하이오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리키는 어느날 어머니 앞에서 폭탄선언을 한다. 대학 졸업장을 버리고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것. 말리다 말리다 포기한 어머니는 안식일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결국 허락했다.

하지만 '선수 리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그는 방망이를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기보다는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야구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했다. 벤치에서든 그라운드에서든, 언제나 생각에 잠겨 있는 리키를 감독과 코치가 좋아할 리 없었다.

선수 은퇴 후 미시건대학에 다시 진학한 리키는 법학을 이수함과 동시에 대학 팀의 코치도 맡았다. 당시 미시건대학 팀에는 역시 아버지로부터 '정 그렇다면 대학부터 마쳐라'라는 조건부 허락을 얻어낸 조지 시슬러가 있었다.

1913년 리키는 아메리칸리그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현 볼티모어)의 감독이 됐다. 시슬러도 내셔널리그에 탄원서를 내는 우여곡절 끝에 마이너리그 팀으로부터 자신의 계약을 사들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의 계약을 무효화하고 브라운스에 입단했다. 리키와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감독 리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덕아웃에서의 리키는 경기에 집중하기보다 감독의 범주를 벗어나는 근본적인 고민들을 했다. 리키는 단장이 된 이후 자신의 생각들을 현실화시키기 시작했다.

리키가 몰고 온 첫번째 변화는 스프링캠프였다. 당시 메이저리그의 스프링캠프는 시즌 시작을 앞두고 연습경기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리키의 스프링캠프에서는 수비 포메이션, 베이스런닝 등 체계적인 훈련이 진행됐다. 리키는 선수들을 앉혀놓고 이론교육도 시켰다. 지금의 배팅 케이지와 피칭 머신은 바로 리키가 고안한 것들이다(리키는 배팅 헬멧을 보급화시키는 데도 앞장섰다).

1917년 미국이 1차대전에 뛰어들자 리키도 화학탄 부대의 장교로 참전했다. 리키의 부대에는 타이 콥과 크리스티 매튜슨도 있었다(한편 38세로 병역이 면제됐음에도 자원입대를 한 매튜슨은 벨기에-프랑스 전선에서 독가스를 들이마셨고, 이후 후유증에 시달리다 45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팜 시스템을 만들다
1919년 군에서 제대한 리키는 내셔널리그의 카디널스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카디널스 선수들의 가슴에 자리한 <방망이의 양쪽 끝에 앉아 있는 붉은 새 두 마리>는 리키가 어느날 교회에서 본 장식에 착안해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리키는 처음으로 어린이 팬들을 무료 입장시키는 마케팅을 했다.

리키가 카디널스에서 이뤄낸 최고의 '혁신'은 팜 시스템(farm system)을 만든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메이저리그 팀이 신인 선수를 얻기 위해서는 마이너리그 팀에서 사와야만 했다. 이에 대형 선수가 등장하면 치열한 돈싸움이 벌어졌으며, 승리는 늘 양키스 같은 부자 구단에게 돌아갔다.

이에 리키는 조용히 마이너리그 팀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직접 선수들과 계약한 후 소속 마이너리그 팀으로 내려보내 훈련을 시켰다. 지금의 팜 시스템이 탄생한 것이었다. 1928년까지 카디널스는 5개의 마이너리그 팀과 수백 명의 선수들을 확보했다. 그리고 여기서 디지 딘, 짐 바텀리, 에노스 슬래터, 조 메드윅, 자니 마이즈, 레드 쇼엔디스트, 스탠 뮤지얼과 같은 명예의 전당 선수를 비롯, 50명이 넘는 메이저리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1925년 리키는 감독을 로저스 혼스비에게 넘겨주고 단장 업무에 집중했다. 때마침 팜 출신들이 본격적으로 가세하기 시작하면서 카디널스의 시대가 열렸다. 1926년 카디널스는 내셔널리그 참가 34년 만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월드시리즈에서는 양키스를 꺾었다. 1928년과 1930년은 리그 우승, 1931년과 1934년은 월드시리즈 우승. 바로 리키가 만들어낸 전성기였다.

※한편 리키의 팜 시스템을 유심히 지켜본 후 가장 먼저 따라한 팀이 있었으니, 바로 양키스였다. 양키스는 1931년부터 팜 시스템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카디널스에서 리키가 저지른 실수가 딱 하나 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나 카디널스 입단을 꿈꾸며 자란 요기 베라를 키가 작다는 이유로 돌려보낸 것.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주장도 존재한다. 베라가 카디널스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한 1942년은 리키가 이미 다저스 이적을 결심했을 때로, 리키는 베라를 다저스에 입단시키기 위해 일부러 낮은 계약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키가 짐을 싸기도 전에 양키스가 나타남으로써, 리키는 남 좋은 일만 시켜줬다.

냉철한 혹은 냉혹한
리키는 야구에서 통계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사람이기도 했다. 다저스로 자리를 옮긴 후인 1947년, 리키는 통계 전문가인 앨런 로스를 고용했고, 로스는 OPS라는 새로운 지표를 만들어냈다. 바로 세이버메트리션의 시작이었다. 리키는 1954년 <라이프>紙에 직접 기고한 글을 통해 타율이 아니라 출루율과 장타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키의 '새로운 통계'는 선수와 연봉 협상을 할 때도 유용하게 사용됐다. 항상 담배 연기가 가득차 있어 '바람의 동굴'로 불린 리키의 사무실은 선수들에게 두려움의 장소였다. 들어가자마자 시작된 리키의 일장 연설을 넋을 놓고 듣다 보면, 어느새 리키가 내민 계약서에는 자신의 사인이 되어 있었다.

리키는 선수들이 듣도 보도 못한 기록을 제시하며 그 선수의 성과를 낮췄고, 그마저도 통하지 않으면 청교도적인 윤리를 내세웠다. 실제로 적지 않은 선수들이 '욕심은 죄악'이라는 리키의 말에 참회하며 도장을 찍었다. 연봉 협상에서 언제나 승리를 거두는 쪽은, 때로는 비열해지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리키였다.

훗날 리키가 인종의 벽을 허물게 된 계기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된다. 대학 코치 시절 리키는 원정길에 올랐다가 팀내 최고의 선수이자 흑인인 찰스 토머스가 숙박 거부를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실랑이 끝에 자기 방에서 재우기로 한 리키는, 토머스가 자신의 검은 피부를 한탄하며 통곡하는 것을 보고 이 잘못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키에게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냉철한 사업가인 리키 입장에서 흑인선수는 결코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엘도라도였다.

돈에 관련해서는 스크루지 저리가라 했던 리키를 설명해주는 일화가 있다. 슬래터는 카디널스와 계약하면서 보너스로 사냥개 두 마리와 엽총 한 자루를 받았다. 하지만 사냥개 두 마리는 데리고 오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훗날 슬래터가 이 이야기를 디지 딘에게 하자 딘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자기 역시 사냥개 두 마리를 받았는데 개들이 받자마자 도망쳤다는 것이다(야구의 역사 中).

1942년 리키의 절친한 친구였던 다저스의 래리 맥파일 단장은 2차대전에 참전하며 리키에게 다저스를 부탁했다. 때마침 리키도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카디널스 구단주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리키는 무대를 옮겼다.

다저스에 온 후 리키는 선수 관리를 더 엄격하게 했다. 클럽하우스에서의 카드놀이, 음주, 흡연을 금지시켰으며. 불시에 체중 검사를 해 다이어트시킬 선수를 골라냈다. 리키는 특히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는데 "한 사람이 1분을 늦게 되면 150명의 2시간 반을 빼앗은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브라운스와 카디널스 시절, 돈이 넉넉하지 못해 덜덜 떨며 스프링캠프를 치러야 했던 리키의 꿈은 '따뜻한 스프링캠프'였다. 다저스에서 리키는 소원을 풀었다. 리키는 플로리다주 베로비치의 낡은 군사시설을 사들여 스프링캠프 구장을 꾸몄고 '다저타운'이라고 불렀다. 현대적인 스프링캠프의 시작이었다.

인종의 벽을 허물다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로빈슨이 뚝 하고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운은 계획에서 비롯된다'(Luck is the residue of design)는 명언의 주인공이기도 한 리키는, 이를 위한 주도면밀하고도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944년 종신 커미셔너였던 케네소 랜디스가 사망하자 마침내 리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랜디스는 빌 비크의 흑인선수 등용 계획을 무산시키는 등 인종의 벽을 앞장 서서 지킨 지독한 인종주의자였다. 비크의 실패를 생생히 지켜본 리키는 때가 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키는 니그로리그 내에 '브라운 다저스'라는 흑인 팀을 만들 거라는 거짓 소문을 낸 후 <최초의 흑인선수>를 찾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그리고 당시 스카우트 생활을 하고 있던 시슬러에게 이를 부탁했다. 시슬러가 발견한 선수는 캔자스시티 모낙스의 로빈슨이었다. 리키는 경기력도 경기력이지만 의지력과 인내심, 그리고 백인들이 깔보지 못하는 배경을 갖춘 선수를 원했다.

UCLA 시절 최고의 육상선수였으며 사관학교 졸업 후 장교가 된 로빈슨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에 차별을 당할 때마다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이에 그에게는 사건 사고가 따라다녔다. 참다 못한 군으로부터 명예제대를 당한 이후, 로빈슨은 니그로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리키는 자신의 앞에 선 로빈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아주 훌륭한 흑인 선수를 찾고 있다네. 그냥 경기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야. 남들이 모욕을 줘도, 비난을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여유와 배짱을 가진 선수라야 하네. 한마디로 흑인의 기수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야 해. 만약 어떤 녀석이 2루로 슬라이딩해 들어오면서 '이 빌어먹을 깜둥이 놈아'하고 욕을 했다고 치세. 자네 같으면 당연히 주먹을 휘두르겠지? 나도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대응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구. 자네가 맞서 싸운다면 이 문제는 20년은 더 후퇴하는 거야. 이것을 참아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필요해. 자네가 그걸 해낼 수 있겠나?"

한참의 침묵 후, 로빈슨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 도박을 벌일 계획이시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드리죠." 그렇게 리키와 로빈슨은 손을 잡았다.

로빈슨을 당장 데뷔시키면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한 리키는, 1946년 로빈슨을 산하 마이너리그 팀인 몬트리올 로열스로 보냈다. 몬트리올은 미국 도시들에 비해 인종차별이 덜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로빈슨은 최고의 경기력으로 팬과 동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로빈슨의 대활약으로 우승하게 되자, 수천 명의 백인 관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로빈슨을 연호했다. 혁명의 시작이었다.

피츠버그에서의 마지막
흑인선수라는 보물상자를 가장 먼저 연 덕분에, 다저스는 내셔널리그 최고의 팀으로 부상했다. 1921년부터 1946년까지 26년간 리그 우승 1번이 전부였던 다저스는, 로빈슨이 데뷔한 해인 1947년부터 1956년까지 10년간 6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리키는 다저스를 나와야만 했다.

1950년 다저스는 4명의 공동 구단주가 25%씩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리키였고, 또 한 명은 구단의 고문 변호사인 월터 오말리였다. 다저스를 독점하고 싶었던 오말리는 구단주 1명이 사망하자 그 지분을 재빨리 매입했다. 그리고 나머지 1명에게도 지분을 사들인 후 리키를 쫓아냈다.

이에 피츠버그로 옮긴 리키가 한 복수는 다저스에서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다저스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클레멘테를 1만달러에 입단시켰다. 하지만 당시 좋은 흑인선수가 넘쳐나고 있었던 다저스는 <4000달러 이상을 받고 입단한 신인선수는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들지 못하면 룰5 드래프트의 대상이 된다>는 규정을 도저히 지킬 수가 없었다. 이에 클레멘테를 몰래 숨겼다. 결국 클레멘테는 이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던 리키의 차지가 됐다.

하지만 다저스에 비하면 재정 상태가 너무나 열악했던 피츠버그에서 리키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리키는 1955년을 마지막으로 피츠버그에서 나왔다. 1960년 리키는 제3의 리그인 컨티넨털리그 창설을 시도했다. 이는 비록 저지됐지만 1961년 LA 에인절스와 워싱턴 세너터스(현 텍사스), 1962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뉴욕 메츠의 창단으로 이어졌다.

1965년 6월, 83살의 리키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던 도중 쓰러졌다. 그리고 84번째 생일을 보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리키가 마지막 강의에서 강조한 것은 '남과 다른 생각을 할 것' 그리고 '도전을 멈추지 말 것'이었다.

한 지인은 그를 보고 "야구에 미치지만 않았으면 작가나 대통령 같은 더 위대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리키는 야구를 선택했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이었던 사람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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