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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 바친 100승 위대한 대투수 밥펠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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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강속구의 계보는 <공이 연기를 내며 들어왔다>는 '스모키' 조 우드와 <공이 지나갈 때 기차 소리가 났다>는 '빅 트레인' 월터 존슨부터 시작된다. 그 뒤를 이은 주인공이 1940년대를 초토화한 '래피드 로버트(Rapid Robert)' 밥 펠러다. 1937년 시범경기에서 펠러를 상대한 뉴욕 자이언츠 선수들의 증언은 한결같았다.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보지는 못했다"
 

군 제대 직후 가진 속도 측정에서 펠러는 98.6마일을 찍었다. ECD라는 군사장비로 측정한 결과에서는 107.9마일이 나오기도 했다. 펠러는 1997년 월드시리즈에서 롭 넨이 102마일을 기록하자 "내 체인지업이 저랬지"라며 껄껄 웃었다. 39세 존슨과 17세 펠러를 모두를 상대해 본 명예의 전당 2루수 찰리 게링거는 '존슨이 더 빨랐지'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 기억은 과대포장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존슨은 게링거가 데뷔 후 처음 상대한 투수였다.

1936년부터 1956년까지 18시즌 동안, 펠러는 오직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만 활약하며 266승162패 3.25, 탈삼진 2581개의 화려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는 최고 전성기였던 23세부터 26세까지의 4년이 빠진 기록이다. 4년 공백이 아니었다면, 펠러는 100승-1000삼진이 추가된 360승-3600삼진으로 은퇴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최다승 투수는 워렌 스판(363승)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1938년부터 1951년까지 풀타임 10시즌은 최고의 전성기였다. 펠러는 6번의 다승 1위와 20승(이상 5시즌 연속) 7번의 탈삼진 1위(7시즌 연속)와 5번의 이닝 1위(5시즌 연속)를 차지하며 아메리칸리그 마운드를 지배했다. 평균자책점도 5위 이내에 6번 들었다(1위는 1번). 그는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자 먼저 연봉 삭감을 요구했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 네 시즌의 공백도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

17세 괴물 소년의 등장
아이오와주의 평범한 농부였던 펠러의 아버지는 열성적인 야구 팬이었다. 아들을 위해 농장 한편에 마운드를 마련한 그는, 나중에는 마치 영화 <꿈의 구장>처럼 펜스와 조명시설까지 갖춘 야구장까지 만들었다. 12살 때 펠러는 고교 팀과 세미프로 팀을 상대한 7경기에서 5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세미프로 팀을 상대로 21개의 삼진을 잡아낸 후 바로 다음 경기에서는 고교 팀을 상대로 23개를 기록했다. 가장 먼저 소문을 들은 클리블랜드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펠러는 계약이 불가능한 16살이었다. 이에 클리블랜드는 마이너리그 구단에 상당액을 지원하는 것으로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커미셔너의 예외 인정을 얻어냈다(랜디스는 펠러 쟁탈전으로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다). 펠러는 얼마를 원햐나는 질문에 1달러와 스카우트로 온 메이저리그 통산 1승의 사이 슬랩니카의 사인볼을 요구했다(슬랩니카는 이후 클리블랜드의 단장이 됐다). 펠러가 그때 받았던 1달러짜리 수표는 지금도 고향의 '밥 펠러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1936년 17살의 펠러는 시범경기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9타자 8삼진'의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더니, 8월24일 메이저리그 첫 선발등판에서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15개의 삼진을 잡아내는 대형사고를 쳤다. 그리고 5번째 선발등판에서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를 제물로 17개의 타이기록(디지 딘)을 세웠다. 펠러의 인기는 엄청났다. 시즌이 끝나자 펠러는 고향으로 돌아가 학교를 졸업했는데, 졸업식을 전국방송(라디오)이 중계했을 정도였다. <타임>지는 8경기 선발등판이 전부인 펠러를 표지모델로 삼았다.

1938년 19살의 펠러는 17승(11패 4.08)과 240삼진으로 7시즌 연속 탈삼진왕의 스타트를 끊었다. 시즌 최종일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18K의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펠러는 지금도 최고기록으로 남아있는 208볼넷(277⅔이닝)도 기록했다. 한 시즌 200개 이상의 볼넷은 펠러와 놀란 라이언(1977년 204개-1974년 202개)뿐이다. 이후 펠러는 3차례 더 볼넷왕에 올랐다. 하지만 라이언과 달리 제구력은 빠르게 좋아졌다.

라이언과 펠러의 비교에서, 많은 수의 전문가들이 펠러의 손을 든다. 제이슨 스탁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과대포장된 우투수로 라이언을, 가장 저평가된 우투수로 펠러를 꼽기도 했다(그가 뽑은 가장 과대포장된 좌투수는 코팩스, 가장 저평가된 좌투수는 베이브 루스다).

1939년 펠러는 24승(9패 2.85)과 246삼진으로 5시즌 연속 '다승-탈삼진 1위'의 스타트를 끊었다. 1984년 드와이트 구든이 나타나기 전까지 최연소 20승 기록이었다. 4.08에서 2.85(3위)으로 낮아진 평균자책점은 최고 시즌이 임박했다는 전조였다. 1940년 결국 펠러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27승11패 2.61 261삼진). 코미스키파크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한 개막전에서는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지금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개막전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볼넷 3개로 내준 2회 무사 만루 위기는 삼진 3개로 탈출했다. 스코어는 1-0이었다.

클리블랜드는 정규시즌 마지막 3연전을 앞두고 리그 1위 디트로이트에 2경기 뒤져 있었다. 마침 마지막 3연전의 상대는 디트로이트. 1차전에 선발로 나선 펠러는 3피안타 2실점으로 분전했다. 하지만 타선이 디트로이트의 신인투수에게 당하며 0-2로 패했다. 클리블랜드는 남은 2경기를 모두 잡아냈지만 결국 1경기 차 2위에 머물렀다.

8개의 무공훈장
1941년에도 펠러는 무려 343이닝을 던지며 25승13패 3.15 260삼진으로 선전했다. 22세 생일 이전 따낸 107승 1233삼진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기록이었다. 리그 MVP 투표에서 펠러보다 많은 표를 얻은 선수는 56경기 연속 안타의 조 디마지오와 4할 타율의 테드 윌리엄스뿐이었다.

하지만 펠러는 멈춰섰다. 스스로 택한 것이었다. 12월8일 연봉 재계약을 위해 차를 몰고 구단으로 향하던 펠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긴급 뉴스를 들었다. 진주만 공습 소식이었다. 펠러는 곧바로 핸들을 꺾었고, 그로부터 3일후 스타 메이저리거로는 행크 그린버그에 이어 2번째로 군에 자원입대했다. 펠러는 암으로 작고한 아버지 대신 가족들의 생계를 돌보고 있어 징집 대상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펠러에게 이유가 되지 못했다.

전함 앨라바마(USS Alabama)호에 배치된 펠러는 시속 160km의 강속구를 뿌리는 대신 분당 160발이 발사되는 40mm 대공포 사수를 맡았다. 유명 선수 대부분이 후방에 배치된 반면(디마지오의 임무는 위문차 군부대를 도는 것이었다) 펠러는 최전방에서 싸웠다. 북해에서 독일 U-보트와 맞섰으며, 태평양 전선에서는 마셜섬 전투, 괌 상륙작전, 도쿄 공습 등 수많은 역사적 전투에 참가했다.

1945년 8월22일, 펠러는 가슴에 8개의 무공훈장을 달고 제대했다. 그리고 복귀전에서 1944-1945년 리그 MVP 할 뉴하우저를 꺾었다(뉴하우저를 싫어한 사람들은 '진짜 에이스가 돌아왔다'며 좋아했다). 군 복무 중 포탄을 들며 근력을 키웠던 펠러는 돌아오자마자 9경기 중 7경기를 완투했다(5승3패 방어율 2.50).

복귀 첫 시즌인 1946년, 펠러는 26승15패 2.18로 변함없는 괴력을 뽐냈다. 36완투(42선발)는 라이브볼 시대 최고기록이었으며, 10번의 완봉과 함께 371⅓이닝을 던졌다. 막강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는 통산 2번째 노히트노런에 성공했다. 348삼진은 1912년 월터 존슨 이후 처음 나온 300K였으며 메이저리그 신기록이었다. 이는 1965년 코팩스가 382삼진을 기록하기 전까지 최고기록으로 남았지만, 훗날 1904년 루브 웨델의 기록이 349개로 수정되면서 자리를 내놓았다.

인디언스의 전설로 남다

1947년(20승11패 2.68 196삼진)은 펠러가 다승과 탈삼진을 마지막으로 동시석권한 시즌이었다. 이후 펠러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1948년(19승15패 3.56 164삼진)에는 7시즌 연속 탈삼진왕에 올랐지만 5시즌 연속 다승왕은 중단됐다. 클리블랜드는 28년 만에 월드시리즈에 올라 보스턴 브레이브스를 상대했다. 펠러는 1차전 1실점 완투에도 패전투수가 됐다. 1실점은 8회말 석연치 않은 세이프 판정을 받은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펠러는 5차전에서 5⅓이닝 7실점 패배를 당했지만, 밥 레먼의 대활약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1949년 15승14패 3.75, 1950년 16승11패 3.43으로 하향세를 막지 못했던 펠러는, 이듬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통산 6번째이자 마지막 다승왕(22승8패 3.50)에 올랐다. 디트로이트전에서는 1개의 안타도 내주지 않으며 3번째 '노히터'를 기록했지만, 실책으로 내보낸 주자가 <도루→견제 악송구→희생플라이>로 홈을 밟아 '노런'은 되지 못했다. 펠러는 코팩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유일한 3회 노히터 달성자였다. 12번의 '원히터'는 라이언과 함께 타이기록으로 남아있다.

1952년 펠러는 9승13패 4.74에 그치며 풀타임 11시즌만에 처음으로 10승에 실패했다. 5할 미만의 승률도 처음이었다. 1954년 클리블랜드는 다시 월드시리즈에 나섰지만 펠러는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클리블랜드는 뉴욕 자이언츠에 4연패로 물러났다. 1955년 36살이 된 '17세 소년'은 마침내 선발진에서 탈락했다. 펠러는 2년 간 5승을 더 올린 후 1956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펠러는 은퇴 후 사업가의 길을 걸어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1957년 클리블랜드는 펠러의 19번을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펠러는 1962년에는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93.75%의 높은 득표율을 얻어, 1936년 월터 존슨-크리스티 매튜슨 이후 처음으로 투표 첫 해 입성하는 투수가 됐다.

1948년 사첼 페이지의 클리블랜드 입단을 가장 반겼던 펠러는 흑인야구의 절대적인 지원자이기도 하다. 그는 2006년 베테랑 위원회가 니그로리그의 전설적인 선수 벅 오닐을 탈락시키자 맹비난을 하기도 했다.  1918년 12월생인 그는 명예의 전당 생존 선수 중 1918년 4월생인 바비 도어 다음으로 고령이다. 펠러의 남은 소원은 클리블랜드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보고 눈을 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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