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믈브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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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로빈슨(1919~1972)이 메이저리그에서 10시즌을 뛰며 올린 성적은 1518안타 타율 .311 137홈런 734타점 197도루에 불과하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였던 그는 방망이와 글러브뿐 아니라 정신력으로 야구를 해야 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로빈슨은 20세기 최초의 흑인선수다. 원래 메이저리그에서는 흑인도 뛸 수 있었다. 하지만 1887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구단주 겸 선수이자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캡 앤슨의 선동으로 흑인선수를 모두 쫓아내면서 내셔널리그를 비롯한 프로리그에는 '흑인선수 불가'라는 불문율이 만들어졌다.

1920년 지독한 인종주의자인 케네소 랜디스가 커미셔너로 취임하면서 '장벽'은 더욱 높고 두터워졌다(법원의 무죄 판결에도 화이트삭스의 8명을 쫓아냈던 랜디스는 승부조작이 명백했던 타이 콥과 트리스 스피커는 모른 채 넘어갔다). 1942년 랜디스는 또 다른 개척자였던 빌 빅으로부터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매입해 흑인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만들 것이라는 계획을 듣자마자 내셔널리그 사무국에 필라델피아 구단을 사라고 압박, 빅의 계획을 무산시키기도 했다.

잭 루즈벨트 로빈슨은 1919년 인종 차별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조지아주 한 소작농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미들 네임은 25일 전에 사망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그가 한 살 때 아버지가 가출하자,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인종 차별이 덜한 곳을 찾아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흑인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현실에 크게 실망한 로빈슨은 한때 갱단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친구의 간곡한 설득으로 벗어났다.

로빈슨의 형 매튜 로빈슨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육상 200m에서 제시 오웬스 다음으로 들어온 은메달리스트였다. 하지만 그 후 제대로 된 직업을 찾지 못한 매튜는 거리의 청소부가 됐다. 어느날은 올림픽 대표팀의 자켓을 입고 청소를 하다가 백인들로부터 신고를 당하기도 했다. 로빈슨은 스포츠 세계로 이끌어준 형의 안타까운 몰락을 보면서 자신은 형과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UCLA대학 시절 로빈슨은 미국을 대표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유격수와 포수를 맡은 야구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뛰기가 주종목이었던 육상에서는 1912년 올림픽에서 5종경기와 10종경기를 석권한 짐 소프에 비유돼 '검은 소프'로 불렸다. 스포츠위클리는 그를 '풋볼 역사상 최고의 하프백'이라고 평가했으며, 농구판에서는 최고의 가드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로빈슨은 UCLA대학의 수영 챔피언이었으며, 전미테니스선수권에서 4강에 오른 적도 있었다.

1942년 로빈슨은 육군에 장교로 지원했다. 하지만 인종이라는 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로빈슨은 우연히 만난 복싱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루이스의 도움 속에 로빈슨은 다른 흑인 지원자들과 함께 제복을 입게 됐다. 군대에서도 로빈슨의 외로운 투쟁은 계속됐다. 버스에서 흑인 자리로 가기를 거부해 군법회의에 소환되기도 했으며, 인종차별을 서슴없이 하는 백인 동료 장교와 싸움을 벌이다 불명예 제대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흑인은 사람도 아니었던 시대
1945년 군에서 제대한 후 니그로리그 캔자스시티 모낙스에서 유격수로 뛰고 있던 로빈슨에게 메이저리그 팀의 입단 테스트 제안이 왔다. 보스턴 레드삭스였다. 하지만 이는 보스턴 구단이 시의회의 요구를 마지 못해 받아들인 것으로, 그들은 흑인선수를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었다. 펜웨이파크에서의 트라이아웃 도중 갑자기 스피커를 찟는 듯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검둥이들을 당장 내보내지 못해!'라고 누가 외친 것. 로빈슨은 다른 선수들과 함께 쫓겨나다시피 경기장을 나왔다(목소리의 주인공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보스턴은 1949년에도 윌리 메이스와 계약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 이에 어떤 사람들은 보스턴이 '밤비노의 저주'가 아니라 '인종차별의 저주'에 시달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보스턴은 필라델피아와 함께 메이저리그에서 흑인선수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팀 중 하나였다. 모든 저주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보스턴은 50년이 지난 후 트라이아웃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 무렵 한 선지자가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브라함 링컨에게 빠져 있었으며, 대학 코치 시절 팀의 유일한 흑인선수가 당하는 고통을 옆에서 생생히 지켜보면서 반드시 인종의 벽을 허물겠다고 결심했던 브랜치 리키(1881~1965)가 그 주인공이었다. 브루클린 다저스의 단장을 맡고 있던 리키는 1944년 랜디스가 사망하자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키는 먼저 니그로리그에 브라운 다저스라는 팀을 만든 다음,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서 함께 뛰었던 조지 시슬러에게 강력한 정신력과 인내심을 가진 흑인선수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시슬러가 데려온 선수는 로빈슨이었다. 리키는 로빈슨에게 "어떠한 모욕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선수를 원한다"며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리키는 로빈슨의 머리를 툭툭 치며 '어이 검둥이'라고 부르는 등 그가 앞으로 경험할 일들에 대해 세세히 설명했다. 로빈슨은 절대로 문제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끝까지 지켜졌다.

사실 야구는 로빈슨이 가장 덜 좋아한 종목이었으며 가장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종목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도전하기 위해 야구를 택했다. 로빈슨은 "인생은 구경만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가족과 주위의 만류를 뒤로 하고 험난한 가시밭길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았다.

1946년 리키는 로빈슨을 산하 마이너리그 팀인 몬트리올 로열스로 보냈고, 로빈슨은 인터내셔널리그 최초의 흑인선수가 됐다. 몬트리올은 대부분의 미국 도시들에 비하면 인종차별이 덜한 곳이었다(훗날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이런 인연을 들어 전구단 영구결번 전에 로빈슨의 42번을 영구결번으로 정하기도 했다). 로빈슨을 떨떠름하게 생각했던 동료들은 곧 그의 경기력에 매혹을 당했다. 로빈슨은 타율과 타점에서 리그 1위에 오르며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우승이 확정된 순간, 수천 명의 백인 관중들이 로빈슨을 연호하며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당시로서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루스가 야구를 바꿨다면, 로빈슨은 미국을 바꿨다
1947년 4월15일, 마침내 로빈슨은 1887년 이후 아무도 넘지 못했던 인종의 벽을 깨고 60년 만에 나타난 흑인선수가 됐다. 2만7000명 에베츠필드의 관중석에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하러 온 흑인 관중이 1만4000명에 달했다.
 

하지만 뉴욕 타임즈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으로 칭한 로빈슨은 팀 동료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노장 외야수 디시 워커는 앞장서서 로빈슨을 쫓아내야 한다는 탄원서를 만들기도 했다. 로빈슨은 원정경기를 가더라도 동료들과 떨어져 흑인 전용 숙소를 이용해야 했으며, 그의 우편함은 매일 협박 편지로 가득찼다. 상대 투수들과 수비수들, 주자들은 로빈슨에게 고의적으로 테러를 가했다. 일부 심판들은 세이프도 아웃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로빈슨은 그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 뿐이었다. 한 번은 에노스 슬래터가 앞장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선수들이 파업을 모의하기도 했다.

1947년 5월14일 신시내티 크로슬리필드를 가득 메운 백인 관중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검둥이'를 합창했다. 신시내티 덕아웃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 때 다저스 유격수 피 위 리즈가 갑자기 자리를 이탈해 1루를 맡고 있던 로빈슨에게 다가갔다. 리즈는 로빈슨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웃으며 대화를 나눈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남부 출신 스타인 리즈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관중들은 야유를 멈췄다. 이는 로빈슨이 버틸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이후에도 리즈는 로빈슨 대신 나서 로빈슨을 지켰다.

"버락 오바마가 재키 로빈슨이라면 힐러리 클린턴은 피 위 리즈다". 얼마전 제시 잭슨 목사의 아들인 제시 잭슨 주니어 민주당 하원의원이 오바마에게는 힐러리가 꼭 필요하다며 한 말이다. 리즈는 "여러가지 이유로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피부색이어서는 안 된다"며 인종 차별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는 시즌 후 방문한 고향 루이빌에서 고향 사람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벤 챔프먼 감독이 소속팀 선수들에게 로빈슨에게 고의적으로 부상을 입히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밝혀지면서 다저스 선수단 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챔프먼은 이 사건으로 야구계에서 퇴출됐다). 그렇지 않아도 로빈슨의 실력에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던 다저스 선수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로빈슨을 동료로 받아들였다.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 로빈슨에게 배달되는 편지는 대부분 '그라운드에 나오면 총으로 쏴버리겠다'는 협박 편지였다. 이에 대해 동료 진 허마스키는 농담 삼아 "우리가 모두 42번을 달고 나가면 어떨까"라는 의견을 냈다. 이에 대해 로빈슨은 "그렇더라도 나를 알아보게 될 걸"이라며 웃었다. 이는 훗날 재키 로빈슨 데이에 원하는 모든 선수들이 42번을 달고 나올 수 있는 이벤트의 바탕이 됐다. 다저스뿐 아니라 미국 사회에도 로빈슨 지지자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방인은 이제 개척자가 됐다.

그의 도전은 스포츠계 뿐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에 있어 흑인과 유색 인종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이정표가 됐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는 미국 군대가 흑인의 입대 제한을 완전히 없앤 시기보다 1년 더 빨랐고, 공립학교에서 백인 학생과 흑인 학생을 따로 교육하던 것을 금지시킨 것보다도 8년이나 빨랐다. 그리고 로빈슨이 데뷔한 후 18년이 지나서야 흑인들은 버스에서 백인의 자리 양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됐다.

만약 로빈슨이 테드 윌리엄스처럼 자신을 비난하는 관중석에 방망이를 던졌거나 거친 말과 행동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다른 팀 선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면 흑인들의 미국 사회 진출은 적어도 몇 년 더 늦춰졌을 것이다.

너무 늦게 시작한 메이저리그 생활
28살에 데뷔한 로빈슨은 1947년 151경기에서 .297 12홈런 48타점 29도루를 기록했다. 온갖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고 올린 값진 성적이었다. 로빈슨은 그 해 처음으로 제정된 신인상의 첫 수상자가 됐으며, 다저스는 7년 만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루수로 시작했던 로빈슨은 이듬해 베테랑 에드 스탠키가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이적하면서 2루수로 전환, 리즈와 함께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로빈슨과 리즈는 역사적인 키스톤 콤비 중 하나로 남았다.

1949년은 로빈슨 최고의 해였다. 시슬러에게 밀어치기를 전수받은 로빈슨은 타율(.342)과 도루에서 리그 1위, 타점과 안타에서 2위, 득점에서 3위에 오르며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했다. 37도루는 내셔널리그에서 19년 만에 나온 리그 최고 기록이었다. 또한 로빈슨은 5개의 홈스틸을 성공시켰다. 로빈슨은 통산 19개의 홈스틸을 성공시켰는데(모두 단독 홈스틸이었다) 이는 2차대전 이후에 뛴 선수 중 최다다. 로빈슨은 34살이었던 1955년 월드시리즈에서도 역대 12개 뿐인 월드시리즈 홈스틸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로빈슨이 있었던 10년간(1947~1956) 다저스는 6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55년에는 창단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다저스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황금시대'였다. 또한 다저스는 로빈슨 덕분에 엄청난 흑인팬을 확보할 수 있었다. 로빈슨은 강타자라기 보다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에 가까웠다. 출중한 수비력과 함께 특히 베이스런닝의 센스는 타이 콥에 버금갈 정도였다. 로빈슨은 협살 상황에서도 자주 목숨을 건져 상대를 허탈하게 만들곤 했다. 또한 그는 1루수, 2루수, 3루수, 좌익수 등 언제나 팀이 원하는 곳에 가서 뛰었다.

1956시즌이 끝나자, 월터 오말리 구단주는 37살이 된 로빈슨을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했다. 이에 로빈슨은 은퇴를 선언했다. 1958년이 되자 흑인선수의 숫자는 200여명으로 불어났다. 로빈슨의 뒤를 따라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될 윌리 메이스, 로이 캄파넬라, 어니 뱅크스, 로베르토 클레멘테 등의 대스타들이 속속 등장했다. 모두 로빈슨이 열어놓은 문을 통해 들어온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유니폼을 벗은 로빈슨에게는 마이너리그 감독을 비롯해 야구계에서 아무런 제의도 들어오지 않았다. 로빈슨은 개인사업을 하면서 흑인들을 위한 일자리 찾기에 매진했다. 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열성적인 지지자로서 흑인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2년 명예의 전당 연설에서 로빈슨은 감독 자리도 흑인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며 다시 한 번 역설했다. 로빈슨의 다음 꿈이었던 흑인 감독은 1975년 자신과 성이 같은 프랭크 로빈슨에 의해 실현됐다.

당뇨병으로 고생한 로빈슨은 말년에는 시력을 거의 잃었다. 1972년 그는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로빈슨이 비교적 일찍 사망한 것에는 선수 시절에 받았던 극심한 스트레스도 원인으로 제기된다. 로빈슨은 1971년 사랑했던 큰 아들이 약물 중독에 시달리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큰 아픔도 경험했다. 다저스는 42번을 영구결번으로 선언했으며, 브로드웨이에서는 그의 인생을 다룬 뮤지컬인 'The First'가 제작됐다. 미국 우편국은 로빈슨의 우표를 공식적으로 발행했다.

1997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로빈슨의 데뷔 50주년을 맞아 42번을 메이저리그 최초의 전구단 영구결번으로 제정했다. 최초의 흑인선수, 최초의 흑인 올스타, 최초의 흑인 MVP, 최초의 흑인 명예의 전당 헌액자. 위대한 선수이기 전에 진정한 영웅이었던 그에게 주는 후손들의 작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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