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믈브 373승 대투수 피트 알렉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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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작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마이클 J 폭스)는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인 1955년으로 간다.

극장 간판에 걸려져 있는 얼굴은 로널드 레이건. 과거의 브라운 박사는 맥플라이에게서 훗날 레이건이 대통령이 된다는 얘기를 듣고 어이없어 한다(한편 <백 투 더 퓨처2>에서 맥플라이는 30년 후인 2015년으로 갔다가 시카고 컵스가 마이애미 게이터스라는 팀을 꺾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라디오 방송국의 스포츠 아나운서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레이건은 실패한 영화배우였다. 영화배우 노조 위원장을 발판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총 52편에 출연했지만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다. 레이건은 한 야구선수의 인생을 다룬 영화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는데, 그가 맡은 인물은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명예의 전당 투수 피트 알렉산더였다.

알렉산더가 메이저리그에서 20시즌을 뛰어서 거둔 성적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373승은 크리스티 매튜슨과 함께 사이 영(511) 월터 존슨(417)에 이은 역대 3위이자 내셔널리그 최다승 기록. 1940년대 후반 매튜슨의 누락된 1승이 발견되기 전까지 그는 역대 단독 3위이자 내셔널리그 단독 1위 대접을 받았다.

크리스티(1900~16) : 551선발 434완투 79완봉 373승188패 2.13 2502K
알렉산더(1911~30) : 599선발 437완투 90완봉 373승208패 2.56 2198K


알렉산더는 방어율에서 4번, 다승-탈삼진-완투에서 6번, 이닝과 완봉에서 7번 리그 1위에 올랐다. 워렌 스판(다승8-완투9)만이 다승과 완투에서 그보다 많은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이닝과 완봉에서 더 많은 타이틀을 따낸 선수는 없다.

알렉산더보다 더 많은 완봉승을 올린 선수는 월터 존슨(110회)뿐이다. 그보다 더 많은 1-0 완봉승(17회)을 따낸 선수 역시 존슨(38회)뿐이다. 역사상 3번의 트리플 크라운을 작성한 투수 역시 알렉산더와 존슨, 그리고 샌디 코우팩스다.

레너드 코페트는 자신의 저서에서 놀란 라이언을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화려한 투수'로, 월터 존슨을 '가장 위대한 투수'로 꼽았다. 그가 알렉산더에게 준 찬사는 '가장 완벽한 투수'였다. 하지만 그의 화려한 기록 이면에는 험난했던 그의 인생이 숨겨져 있다.

4번의 트리플 크라운
알렉산더는 네브라스카주의 한 농장에서 12남1녀 중 6째로 태어났다. 알렉산더의 본명은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 알렉산더의 아버지는 그에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그로버 클리브랜드(22대, 24대)의 이름을 붙여줬다.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고 지어준 이름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책과 연필이 아닌 공과 글러브를 잡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앉아있는 새를 향해 돌을 던지면 백발백중이었다.

1909년 22살의 알렉산더는 마이너리그 팀에서 출중한 실력을 뽐냈다. 메이저리그 무대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불운이 찾아왔다. 1루에서 2루로 뛰던 도중 유격수가 던진 공에 머리를 맞고 기절하는 일이 일어난 것. 알렉산더는 무려 56시간의 혼수상태 끝에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시신경에 손상을 입어 공이 2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팀은 그를 다른 마이너리그 팀으로 팔아버렸다. 그 팀 역시 그를 또 다른 팀으로 넘겼다. 알렉산더의 야구 인생은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듬해가 되자 시력 문제는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알렉산더가 다시 눈부신 성적을 냈음은 물론이다(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은 훗날 밝혀지게 된다). 56이닝 연속 무실점을 포함해 27승 중 15승을 완봉으로 따낸 알렉산더는 결국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선택을 받았다.

1911년 알렉산더는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메이저리그에 등장했다. 다승(28) 이닝(367) 완투(31/37) 완봉(7) 4관왕과 함께 탈삼진(227) 2위, 방어율(2.57) 5위에 오른 것. 특히 시즌 막판 사이 영과의 맞대결에서 거둔 1-0 1안타 완봉승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영은 그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28승은 아직도 메이저리그 신인 최다승으로 남아있으며, 227삼진은 1984년 드와이트 구든(276삼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73년간 내셔널리그 신인 최고기록으로 있었다(아메리칸리그에서는 1955년 허브 스코어가 245개로 경신).

1915년 알렉산더는 자신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31승10패 방어율 1.22로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것. 또한 4개의 1안타 완봉승이 포함된 12개의 완봉승으로 내셔널리그 최고기록을 세웠다. 알렉산더는 1916년에도 33승12패 방어율 1.55로 2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에 성공했으며, 지금도 메이저리그 기록으로 남아있는 16개의 완봉승을 따냈다.

1917년 알렉산더는 또다시 30승(13패 1.83)에 성공, 1900년 이후 매튜슨에 이은 역대 2번째이자 마지막 '3년 연속 30승'을 달성했다. 3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일 뿐아니라 3년 연속 다승-방어율-탈삼진-이닝-완투-완봉 1위였다.

크리스티(1903~05) : 125선발 102완투 15완봉 94승34패 1.87 1072.2이닝
알렉산더(1915~17) : 131선발 108완투 36완봉 94승35패 1.54 1153.1이닝


하지만 훗날 '규정이닝'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1917년 내셔널리그의 방어율 1위는 388이닝에서 1.83을 기록한 알렉산더에서, 알렉산더보다 226이닝을 적게 던진 뉴욕 자이언츠의 불펜투수 프레드 앤더슨(162이닝 8승8패 방어율 1.44)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알렉산더의 3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은 취소됐으며, 통산 4회 기록 역시 3회로 줄어들었다.

알렉산더가 필라델피아에서 뛴 첫 7년간 올린 승수는 190승. 연평균으로는 40선발 31완투(8완봉) 356이닝, 27승13패 방어율 2.12였다. 특히 이는 그가 당시 내셔널리그의 모든 투수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베이커보울에서 얻은 성적이다. 당시는 공에 반발력이 없는 '데드볼 시대'였지만, 필라델피아의 홈구장인 베이커보울은 우측 펜스까지의 거리가 83m에 불과한 당대 최고의 '투수 무덤'이었다.

명실상부한 내셔널리그의 최고 투수에 등극한 알렉산더는 1887년생 동갑내기인 아메리칸리그의 월터 존슨과 함께 이대로 둘만의 시대를 열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에게 엄청난 불운이 찾아왔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었다.

전쟁, 그리고 술
1918년 알렉산더가 징집 대상인 것을 알게 된 필라델피아는 그와 포수를 묶어 시카고 컵스로 보내고 두 선수와 함께 5만5000달러를 받았다. 7년전 필라델피아가 알렉산더를 데려오면서 마이너리그 팀에게 지불한 돈은 750달러였다. 알렉산더는 예정대로 3경기 등판 후 입대했고 프랑스 전선에 배치됐다.

프랑스에서 알렉산더는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끔찍한 경험을 했다. 악명 높은 참호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포격의 공포를 감당해야만 것. 이 포격을 통해 알렉산더는 왼쪽 귀의 청력을 완전히 잃었으며, 오른쪽 귀도 잘 들리지 않게 됐다. 또한 그에게는 생명과 다름없는 오른팔에도 부상을 입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알렉산더는 본격적으로 간질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이는 22살 때 머리에 공을 맞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알 수 없는 공포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찾아왔다. 원래 애주가 집안이었던 알렉산더는 이 때부터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가 발작을 일으켜 쓰러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술 때문에 그러는 것으로 오해했다.

한편 1차대전은 또 다른 대투수의 목숨도 앗아갔는데, 은퇴 후 참전했던 매튜슨은 독가스 공격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8년 뒤 사망했다.

1919년 5월 전장에서 돌아온 알렉산더는 이듬해인 1920년 다시 다승(27)-방어율(1.91)-탈삼진-이닝(363⅓)-완투(33)에서 1위에 오르며 3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것이 알렉산더 마지막 질주였다. 전성기 시절 알렉산더는 정상급의 패스트볼과 날카로운 커브, 당대 최고의 제구력을 모두 갖춘 투수였다. 하지만 1920년 이후에는 제구력에만 의존하는 투수로 바뀌었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0년간 6번의 1점대 방어율과 4번의 2점대 방어율을 기록했던 알렉산더는 이후 은퇴할 때까지 9년간 1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3점대 방어율에 그쳤다. 또 단 한 번도 100개 이상의 삼진을 기록하지 못했다. 첫 7년간 연평균 200개씩을 잡아냈던 그였다. 물론 이는 1920년부터 시작된 '라이브볼 시대'와 나이에 따른 노쇠화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쟁 후유증이 더 결정적이었다.

1926시즌 중반 컵스는 예전의 모습을 잃은 알렉산더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넘겼다. 이것이 세인트루이스의 역사를 바꿀 줄은 아무도 몰랐다.


마지막 투혼
그해 세인트루이스는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상대는 '살인타선'의 뉴욕 양키스. 알렉산더는 팀이 1패를 안은 2차전에 나서 2실점 완투승, 다시 팀이 2승3패의 탈락 위기에 몰린 6차전에서 2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그리고 시작된 7차전. 세인트루이스 로저스 혼스비 감독은 3-2로 앞선 7회말, 2사 만루의 위기에 몰리자 알렉산더를 마운드에 올렸다. 알렉산더는 전날 완투승을 거둔 후 술을 진탕 마셔 감독이 부르기 전까지 덕아웃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타석에는 살인타선의 6번타자인 만 22세의 신인 토니 라제리. 하지만 39세의 퇴물 투수는 공 4개로 라제리를 삼진처리한 다음 나머지 2이닝도 무실점으로 막아 결국 팀의 3-2 승리를 지켜냈다(9회말 알렉산더로부터 고의4구를 얻어 출루한 루스는 2사 후 2루 도루를 감행하다 어이없는 '끝내기 주루사'를 당했다). 세인트루이스에게는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이었다.

그해 200⅓이닝에서 단 47개의 탈심진을 기록하는데 그쳤던 알렉산더는 양키스를 상대로 던진 월드시리즈 20⅓이닝에서 17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그만큼 자신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피칭이었다.

이듬해 만 40세의 알렉산더는 자신의 통산 9번째이자 마지막 20승(21) 그리고 마지막 2점대 방어율(2.52)를 기록했다. 그리고 다시 필라델피아로 돌아간 1930년 만 43세의 나이로 유니폼을 벗었다. 알렉산더는 1936년 매튜슨과 존슨에게 밀려 '최초의 5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1938년 3번째 도전에서 80.92%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937년에 입성한 사이 영의 득표율은 76.12%였다.

선수생활 동안 돈만큼은 착실히 모은 타이 콥은 은퇴 후 부동산과 제너럴모터스, 코카콜라 등의 주식에 돈을 투자해 갑부가 됐다. 하지만 술에 빠져 살며 자신의 전재산을 탕진한 알렉산더는 은퇴 후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리고 오른쪽 귀마저 아예 들리지 않게 됐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알렉산더는 1944년 한 인터뷰에서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것은 자랑스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명예의 전당을 뜯어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말해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1950년 필라델피아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알렉산더가 첫 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한 1915년 이후 첫 진출이었다. 필라델피아는 알렉산더를 초대했지만 양키스에게 4연패로 당했다. 월드시리즈가 끝난 직후 알렉산더는 네브라스카주 세인트폴의 한 호텔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그의 옆에는 아내 에이미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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