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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팅 머신 웨이드 보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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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50년대 테드 윌리엄스(1939년 데뷔), 1960~70년대 칼 야스트렘스키(1961년 데뷔)의 뒤를 이은 보스턴 최고의 선수는 웨이드 보그스(1982년 데뷔)였다. 윌리엄스와 야스트렘스키는 보스턴에서만 평생을 뛰었고 결국 우승반지 없이 은퇴했다. 하지만 보그스에게는 월드시리즈 우승반지가 있다. 그것도 최대 라이벌인 양키스에서 따낸 반지다.

1993년 보그스의 양키스 입단은 두 팀의 라이벌 관계가 심화된 이후 자발적으로 일어난 최초의 '야구적 망명' 사례였다. 이후 로저 클레멘스와 자니 데이먼도 보스턴 출신으로서 양키스에 입단했다. 하지만 클레멘스는 토론토에서 2년을 뛴 다음 트레이드를 통한 입단이었고, 데이먼은 밤비노의 저주가 깨지고 난 후였다. 어느 것도 보그스의 이적만큼 충격적이진 않았다.

보그스는 파이 트레이너, 에디 매튜스, 브룩스 로빈슨, 마이크 슈미트, 조지 브렛과 함께 기자 투표를 통해 명예의 전당에 오른 6명의 3루수 중 1명이다. 1985년부터 1996년까지는 12년 연속으로 아메리칸리그의 올스타전 선발 3루수로 나섰는데, 이는 로빈슨(15년 연속)에 이어 3루수 선발 출장 역대 2위 기록이다.

아메리칸리그의 토니 그윈
1980~90년대 내셔널리그에 토니 그윈이 있었다면 아메리칸리그에는 보그스가 있었다(둘은 1982년 같은 해에 데뷔했다). 보그스의 통산 타율 .328는 20세기 3루수 최고 기록이며, 800경기 이상 3루수로 나선 선수 중 가장 좋은 기록이다. 역대 3루수 중 3000안타 달성자는 보그스와 조지 브렛 2명. 하지만 브렛이 커리어의 20%를 1루수로 뛴 반면, 보그스는 97%를 3루수로 뛰었다.

보그스는 1983년부터 1989년까지 7년 연속 200안타를 기록했다. 윌리 킬러가 1894년부터 1901년까지 기록한 8년 연속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스즈키 이치로가 10년 연속을 달성하기 전까지 1900년 이후 최고 기록이자 아메리칸리그 최고 기록이었다. 보그스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타격왕 4연패에 성공했다. 1984년의 3위만 아니었다면 로저스 혼스비가 가지고 있는 6연패 최고 기록과 타이를 이룰 수도 있었다. 아메리칸리그에서 보그스보다 더 많은 타이틀을 따낸 선수는 3명, 타이 콥(11회) 로드 커루(7회) 테드 윌리엄스(6회)뿐이다.

보그스의 라이벌은 데뷔 동기인 그윈이었다. 출발은 보그스가 더 좋았다. 1980년대 보그스는 .352라는 무시무시한 타율을 기록했고 5개의 타이틀을 따냈다. 반면 그윈은 .332와 4개의 타이틀로 보그스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윈이 1990년대에 80년대보다 더 좋은 .344를 기록하고 4개를 더 따낸 반면, 보그스는 .304에 그쳤고 1개도 추가하지 못했다. 결국 보그스는 그윈(.338, 타격왕 8회)보다 낮은 타율과 적은 타이틀로 유니폼을 벗었다.

보그스는 그윈, 이치로와 같은 안타 제조기였지만, 안타에만 집중했던 이들과 달리 볼넷 역시 놓치지 않았다. 보그스는 초구에는 절대로 방망이를 내지 않았으며, 투수로 하여금 많은 공을 던지게 만들었다. 보그스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으로 200안타와 100볼넷을 동시에 기록했는데, 이는 루 게릭의 3년 연속 기록(1930~1932)을 넘어서는 메이저리그 신기록이었다.

[통산 성적을 162경기로 환산한 성적]

보그스 : .328 .415 .443 / 200안타 8홈런 94볼넷 49삼진  2도루
이치로 : .331 .376 .430 / 229안타 9홈런 47볼넷 70삼진 39도루
그윈  : .338 .388 .459 / 209안타 9홈런 52볼넷 29삼진 21도루

이에 출루율 1위에 오른 것이 그윈은 단 1차례이고 이치로는 없는 반면, 보그스는 6번이나 올랐다. 볼넷 1위도 두 번을 차지한 오른 보그스는, 누구의 말마따나 '홈런 못치는 테드 윌리엄스'였다. 보그스는 안타가 아니면 볼넷을 통해 자신이 나선 경기의 80%를 넘는 경기에서 출루에 성공했다.

보그스의 최대 약점은 스피드였다. 이에 이치로가 383개를 기록 중이고 그윈이 319개로 은퇴한 반면, 보그스는 1년당 1개를 겨우 넘는 통산 24개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보그스는 이치로에 '볼넷을 더하고 도루를 뺀' 모습이었다.

늦은 데뷔, 거침없는 질주
1958년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난 보그스가 성장한 곳은 플로리다주 탬파였다. 보그스는 고교 시절 미식축구 팀에서 주를 대표하는 키커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보그스의 꿈은 야구였다. 보그스는 고교 시절 아버지가 사준 테드 윌리엄스의 저서 <타격의 과학>(The Science of Hitting)을 읽고 또 읽었고, 1976년 보스턴이 7라운드에서 지명하자 주저하지 않고 유니폼을 입었다.

프로에서의 첫 해, 보그스는 하위싱글A 엘미라에서 .268에 그쳤는데 엘미라 감독은 구단에 <메이저리그 감은 아님>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보그스는 이 때문에 무려 6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내야 했다. 그리고 1981년 트리플A 타격왕에 오르고 나서야 이 보고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한편 보그스는 1981년 트리플A에서 8시간25분이 걸린 33회짜리 미국 프로야구 사상 최장시간 경기를 치르게 되는데, 상대 팀의 3루수는 칼 립켄 주니어였다)

1982년 24살이라는 나이로 데뷔한 보그스는, 300타수 이상 아메리칸리그 신인 최고 타율인 .349를 기록하고 립켄과 켄트 허벡에 이어 신인왕 3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361의 타율로 첫 타격왕에 올랐다. 1985년 보그스는 240안타를 기록, 1930년 이후 메이저리그 최다 안타 기록을 세웠다. 특히 6월9일부터 이듬해 6월7일까지는 정확히 162경기에서 .400을 기록하기도 했다.

1986년 마지막 2경기를 남겨놓고 보그스(.357)는 양키스 돈 매팅리(.352)로부터 맹추격을 받고 있었다. 보그스는 마지막 2경기를 나서지 않았고 타격왕은 지켜졌다. 그 해 보스턴은 1975년 이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하지만 뉴욕 메츠와의 7차전 접전 끝에 패했다. 7차전 종료 후 보그스가 덕아웃에 앉아 펑펑 울고 있는 장면은 그 해를 대표하는 사진 중 하나가 됐다.

1987년은 최고의 해였다. 보그스는 1번타자로서 200안타-105볼넷과 함께 108득점-89타점을 기록했다(.363 .461 .588). 또한 무려 24개의 홈런을 날렸는데, 이 시즌을 제외하면 보그스의 최고 기록은 11개이며, 18시즌 중 16시즌에서 한자릿수를 기록했다. 대신 보그스는 매년 40개가 넘는 2루타를 날렸다.

1988년 보그스는 타이 콥(5연패) 혼스비(6연패) 커루(4연패)에 이어 역대 4번째로 타격왕 4연패에 성공했다. 그리고 통산 5번째 타격왕에 오름으로써 빌 매드록이 가지고 있던 3루수 최다 기록(4회)을 경신했다. 1989년 보그스는 5연패에 실패했지만 .330를 기록하고 3위에 올랐다(7년간 타격왕 5회, 3위 2회). 한편 그 해 보그스는 내연녀 마고 애덤스가 자신의 사생활을 마구 폭로하고 다니면서, 그 전까지 가정적이었던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1980년대에 보그스(.352)보다 더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2위 그윈 .332, 3위 매팅리 .323, 4위 브렛 .311). 그리고 1990년대가 시작되자 관심은 보그스가 언제 테드 윌리엄스(6회)를 뛰어넘는지에 모아졌다.

이적, 그리고 우승
그러나 1990년부터 보그스는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 해 보그스는 데뷔 후 가장 낮은 .302에 그치며 겨우 3할을 지켰다(한편 보스턴은 시즌 중반 보그스에 앞길이 막혀 있던 한 3루수 유망주를 휴스턴으로 보냈다. 제프 배그웰이었다). 1991년 보그스는 다시 .332를 기록하고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1992년 스프링캠프에서 보그스는 보스턴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예언했다. 이는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1918년 보스턴이 마지막 우승을 차지했는데, 1991년에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졌으니 1992년의 우승팀은 보스턴이 될 거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 해 보스턴은 보그스의 말과는 정반대로 1939년 이후 처음으로 리그 꼴찌 팀이 됐다. 보그스의 타율도 .259로 곤두박질쳤다.

시즌 후 보스턴 팬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팀이 보그스를 잡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FA가 된 보그스에게는 다저스와 양키스가 달려들었다. 보그스는 조건이 더 좋은 양키스를 택했다. 보스턴 팬 입장에서는 팀의 간판이었던 선수가 하루 아침에 적으로 돌변한 것.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양키스에서 보그스는 다시 3할 타자로 돌아왔다. 특히 1994년에는 만 36세의 나이로 첫 번째 골드글러브를 따내고 이듬해 2연패에 성공했는데, 1957년부터 시작된 골드글러브 역사상 보그스보다 더 많은 나이로 첫 번째 수상에 성공한 선수는 없다. 민첩성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데다 데뷔 초기에는 송구까지 불안했던 보그스는, 엄청난 노력을 통해 정상급의 수비력을 갖추게 됐다.

1996년 보그스는 10년 만에 월드시리즈 무대를 다시 밟았다. 1986년에는 보스턴 유니폼, 이번에는 양키스 유니폼이었다. 4차전 6-6으로 맞선 연장 10회초. 애틀랜타 바비 콕스 감독은 2사 1,2루에서 스위치히터인 버니 윌리엄스가 들어서자 스티브 에이버리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하고 좌타자인 보그스를 상대하게 했다. 하지만 보그스는 볼카운트 2-1에서 볼 3개를 연속해서 골라 밀어내기 볼넷으로 결승점을 뽑아냈다. 4차전은 시리즈 최고의 분수령이었다. 결국 양키스는 2연패 후 4연승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이 확정되자 보그스는 그 어떤 선수보다도 기뻐했다. 그리고 뉴욕 기마경찰관의 뒤에 올라타 양키스타디움을 돌며 환호했다. 일부 보스턴 팬들은 이 장면에 상처를 받았고, 또 일부 팬들은 분노했다.

1920년 양키스는 보스턴에서 베이브 루스를 데려왔다. 그리고 루스의 4번째 시즌인 1923년에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양키스는 1993년 보그스를 영입했는데, 보그스의 4번째 시즌인 1996년에 다시 18년이라는 긴 침묵을 깨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1997년 보그스는 부상으로 59경기를 놓쳤고 2번째로 3할 타율에 실패했다(.292). 디비전시리즈에서 7타수3안타를 기록했지만, 양키스의 결정을 되돌리지는 못했다(양키스의 3루는 찰리 헤이스를 거쳐 1998년 스캇 브로셔스에게로 넘어갔다). 한편 그 해 보그스는 에인절스전에서 마운드에 올라 토드 그린을 삼진으로 잡아내는 등 1이닝을 1볼넷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필 니크로의 열성 팬이었던 보그스는 17개 중 16개를 너클볼로 던졌는데 그 위력이 놀라웠다.

3000안타, 징크스
1998년 보그스를 데려간 팀은 신생 팀 탬파베이였다. 탬파베이는 팀의 간판으로 탬파 출신인 보그스를 골랐다. 보그스는 탬파베이의 역사적인 첫 경기에서 구단 제1호 홈런의 주인공이 됐다.

1999년 8월7일, 보그스는 하루 차이로 그윈에 이어 역대 21번째 3000안타 달성자가 됐다. 특히 보그스는 사상 최초로 3000안타를 홈런으로 뽑아낸 선수가 됐는데, 이는 그의 통산 118호이자 마지막 홈런이었다. 보그스는 20일 후 통산 3번째 부상자명단에 올랐다. 그리고 유니폼을 벗었다.

보그스가 은퇴한 후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보그스가 탬파베이 모자를 쓰고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대신 탬파베이로부터 영구결번과 100만달러를 받기로 했다는 것. 탬파베이는 실제로 210안타를 기록한 것이 전부인 보그스에게 팀 최초이자 아직도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영구결번을 줬다.

현역 시절 보그스는 최고의 미신(또는 징크스) 신봉자였다. 그는 항상 다음날 4타수4안타를 기록하는 상상을 하며 잠을 청했다. 그리고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길로 경기장에 왔다. 보그스는 경기전 수비 훈련에서 언제나 150개의 타구만 처리했다. 그리고 정확히 5시17분에 배팅 케이지에 들어섰고, 7시17분부터 달리기를 했다. 이에 토론토는 보그스를 골탕먹이기 위해 전광판 시계를 7시16분에서 7시18분으로 넘어가게 하기도 했다.

보그스는 경기전이면 항상 닭고기를 먹었다. 이에 짐 라이스는 그에게 '치킨 맨'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보그스는 타석에 들어서면 히브리어로 인생을 뜻하는 'Chai'라는 단어를 방망이로 썼다. 그는 유태인이 아니었다. 덕아웃에서 3루로 이동할 때에는 언제나 같은 경로를 이용했으며, 집으로 돌아갈 때도 같은 길을 이용했다. 사고가 나서 길이 막히더라도 다른 길로 돌아가지 않았다.

보그스가 시간에 집착한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늘 계획표에 따른 생활을 했고 아들도 그렇게 만들었다. 현역 시절 자신이 믿었던 미신이 75개에서 80개 정도는 됐을 것이라고 한 보그스는, 그 미신들이 집중력을 높이고 성실한 선수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2005년 보그스는 91.9%의 높은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보그스는 "세 팀은 내게 모두 소중한 팀들"이라면서 탬파베이와의 거래설을 일축하고 선택권을 명예의 전당 위원회로 넘겼다. 위원회는 보그스의 동판에 보스턴 모자를 씌워줬다. 보통 영구결번은 명예의 전당 입성과 함께 이루어지기 마련. 하지만 보스턴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가뜩이나 영구결번에 깐깐한 보스턴이 저주가 끝나기도 전에 양키스로 가서 우승반지를 따낸 선수를 선택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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